[강선생의 영화한편] 말죽거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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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의 영화한편] 말죽거리 잔혹사
  • 강재선
  • 승인 2004.05.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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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학교에서 배운 것 <유 하>


쪵영화의 배경은 유신체제로 멍든 70년대, 급속한 재개발 지역이었던 말죽거리. 학생의 인격을 걸레 취급하는 선생들이 있고 권력의 밑바닥을 핥는 학교가 있다. 일상화된 폭언과 구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비겁한 어른들을 닮아가거나 불합리와 불의를 수용하는 폭력적인 수컷이 되어 간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순수했으나 무력했던 소년이 세상의 벽에 부딪쳐 괴물이 되어야 했던 이야기다. '말죽거리..’는 청춘에 대한 헌사다.
그러나, 청춘은 시대의 흉포한 마초 문화와 한몸이어서, 가혹했던 과거를 부정하는 가운데에 기이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른바 ‘수컷들의 영화’가 거북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쪵생각해보니, 고등학교시절, 대학초반시절, 나는 여성 마초였다. 어째서 남성성을 키워댔는지 모르겠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내 모습은 초라했고,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당시의 내 모습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지금 나를 보고 변했다느니, 약해졌다느니 한다.
실상 내 안의 것은 변한 것이 없는데….

감당할 수 없었던 불일치를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내가 서서히 가까워졌을 뿐이다. 좀 더 똘똘했다면, 거칠고 걸걸하게 보이는 대신, 인격수양에 힘썼을 것을, 그랬다면 그럴듯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쪵멋진 근육의 현수가 유리창을 깨며 선생들을 향해 욕을 날리는 순간에 울먹거렸던 건, 여전히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가 싸움을 통해 얻은 건 승리나 허세가 아니라, 자괴감과 절망이었으리라. 현수의 꿈틀거림만큼 아프고 무기력하진 않았지만, 목에 바람을 잔뜩 넣은 개구리마냥 있지도 않은 남성성의 허세를 부리던 자아분열의 시기가 생각났다.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에 눈물짓고, 우정을 잃고,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폭발하고 난 후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에게로 천착하는 길은 참으로 멀다.                                      

강재선(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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