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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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하여
  • 강신익
  • 승인 2003.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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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성인들을 배출해 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들이다.
기독교인들은 각 성인들의 순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이를 기념하고 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인간사의 특정 부분을 나누어 관장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들을 모방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분야의 수호성인을 가지고 있다.
치과의사의 수호성인이 된 성 아폴로니아는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 행정장관의 딸로 태어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거나 화형에 처해지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폭도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치아를 부러뜨리고 산채로 화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그녀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결박을 풀어달라고 요구한다. 결박이 풀리자 스스로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전설에 따르면 불길 속에서 죽어가던 그녀는, 치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청하면 들어주겠노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녀는 249년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후대인들은 매년 2월 9일을 아폴로니아의 날로 기념했다고 한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성당들은 조각상이나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 벽화, 자수의 형태로 재현한 아폴로니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들의 삶을 재현하는 연극이 성행하기도 했는데, 위 그림은 아폴로니아의 순교를 재현하는 연극의 한 장면을 그린 15세기 중반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중세 유럽에서 행하던 신비극의 모습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언젠가 본 영화 중에 ‘마라톤 맨’이라는 것이 있었다. 오래 되어서 어떤 내용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치과의사이기도 한 악당에게 주인공인 더스틴 호프만이 고문을 받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마취도 없이 멀쩡한 이에 구멍을 뚫는 것이었는데, 주인공은 고통에 못 이겨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악당인 치과의사는 자백에 대한 대가로 선심 쓰듯이 진통제를 내준다.
이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치통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두 경우 모두에서 치통은 인위적으로 가하고 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한 인간의 신앙을 억압하기위한 수단으로, 뒷이야기에서는 정보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치아에 위해 고통을 가한다.

하지만 앞의 이야기에서는 고통이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로 승화하고 있는 반면, 뒷이야기에서는 속세의 사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억압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 본 그림에서와 같이 중세의 떠돌이 치과의사들은 대체로 공포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민중의 고통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고통을 경감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중시켰다는 혐의가 짙다.

1846년 치과의사 윌리엄 모튼이 에테르를 이용한 전신마취를 발견하고, 국소마취를 광범하게 사용한 이후에 이러한 공포는 많이 사라졌으며, 치과의사에게 딸려 다니던 사기꾼의 이미지는 과학자의 이미지와 따뜻한 이웃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치과의사는 알게 모르게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더 큰 고통을 줄여주거나 앞으로 닥칠 고통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인 것은 틀림없겠으나, 나의 행위가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환자는 그 고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한 번 더 반성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강신익(인제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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