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촛불 정국과 진보진영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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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촛불 정국과 진보진영의 과제
  • 문진영
  • 승인 2008.06.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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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복지국가 Society(www.welfarestate.net)에 문진영 정책위원장이 기고한 칼럼의 전문이다. (편집자)

지난 6월 10일 정부의 대미 소고기 협상에 실망한 국민들이 너도 나도 촛불을 들고 시청 앞에 모였다. 21년 전 6·10항쟁 때와는 사뭇 다르게 축제 분위기에서 시작된 집회는 날씨가 어두워지자,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부터 숭례문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촛불의 바다가 펼쳐졌다. 이 넘실거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바다에서는 어디론가 박차고 나아가려는 민중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감동이고 전율이었다. 미래를 향한 꿈이고 용솟음이었다. 

하지만 이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의 힘과 꿈을 향한 용솟음을 확인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마냥 좋아 할 수만 없는 것은, 어쩌면 이것은 21년 전의 참여자에서 이제는 관찰자가 되어버린 필자의 못된 습성 탓일 수도 있을 것이나, 이렇듯 뚜벅 뚜벅 스스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온 민중의 힘 앞에서 너무나 왜소해 보이는 진보진영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촛불의 끝없는 행렬과 자발적 힘의 분출, 그리고 완고하고 작아 보이는 진보진영의 모습이 필자의 머리에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진영은 왜 이리 작아졌을까? 이제 더 이상 광장과 대로의 주인공이 아니다. 아니, 우리의 진보진영은 자신들이 왜소해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때 새삼스럽게 영국 노동당의 당헌 개정 과정이 떠올랐다. 왜일까? 이것이 변화하는 시대에 진보정당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적인 교훈이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도 명색에 사회주의 정당인만큼 아래와 같이 당헌(黨憲)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의 근면성에 대한 과실을 충분히 보장하고, 또 그 과실을 가장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분배 그리고 교환의 수단을 공동소유하고, 각 산업과 서비스의 관리를 노동자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 (노동당 구(舊) 당헌 제4조). 

지금은 대처 수상의 진정한 후계자이자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토니 블레어 전(前) 수상도 1983년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서 “나는 책 몇 권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이렇듯 누가 뭐래도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노동당원들에게 생산수단의 사회화 원칙은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신적인 고향을 상징하고 있었다. 

물론 이 당헌 제4조가 노동당을 사회주의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버팀목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사문화된 조항이었기 때문에 노동당 내의 우파 현실주의자들로부터 줄곧 개정의 압력을 받아왔다.

예를 들면, 1950년대 말 노동당수로서 활동하였던 휴 게이쓰켈(Hugh Gaitskell)은 당시 노동당의 연속적인 집권 실패의 원인을 노동당의 완고한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일반국민의 이미지라고 판단하고, 1959년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제4조를 폐지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당헌 제4조는 현실 적용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불가침적 숭배의 대상으로 노동당원들의 정신적 고향이었기 때문에, 베반(Nye Bevan)을 중심으로 한 ‘좌익고수 그룹(Keep Left Group)’ 등 당내의 좌파세력이 반격에 나서자 무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한 세대가 지난 1995년 4월 토니 블레어 노동당 당수는 임시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1959년 게이쓰켈이 내걸었던 똑같은 명분, 즉 노동당의 비현실적인 사회주의 강령에 대한 일반국민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1970년대 말 이후 4회 연속으로 집권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를 제거해야만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로 다시 한 번 당헌 제4조의 개정을 추진하였는데,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개정하는 데 성공한다. 

“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이다. 노동당은 각 개인에게는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창조하며, 우리 모두에게는 권력, 부, 그리고 기회가 소수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우리 공동의 노력으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향유하는 권리는 이에 상응하는 우리의 의무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연대와 관용 그리고 상호존중의 정신을 가지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노동당 당헌 제4조). 

이 조항의 개정여부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핵심적인 이슈는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즉, 국유화를 통한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라는 이념적인 내용 그 자체보다는, 노동당이 ‘목적(이상)’과 이를 추구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현실)’ 사이의 모호성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수권정당으로서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갈 수 없다고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당은 당헌 제4조의 개정으로 인해서 구(舊) 노동당(Old Labour)의 가치관과 이에 기초한 정책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1997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지금까지 10년 넘게 집권하고 있다. 

한편, 토니 블레어는 1997년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스웨덴의 말모(Malmo)에서 개최된 유럽 사회주의정당 회의(the Congress of Socialist Parties)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은 '개혁이냐 죽음이냐(modernise or die)'라는 선택만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진보성을 가지는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다시, 촛불의 행렬을 본다. 이 소중한 자발적 힘의 분출 앞에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 이제 우리 모두는 촛불 집회에서 보여준 민중의 힘을 진보진영의 에너지로 전화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우리 진보진영은 민중의 분출하는 힘을 받아 담을 용광로처럼 생긴 거대한 그릇이어야 한다. 진보진영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우리가 그러한가? 

이제 진보진영의 나아갈 길은 하나다. 우리가 사는 세상, 민생의 현장과 광장에 좀 더 근접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바뀌어야 한다. 꼭 영국의 노동당처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사례일 따름이다. 진보진영 특히, 진보정당은 좀 더 유연해지도록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촛불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이렇게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데,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은 판에, 언제까지 NL과 PD로 서로 반목하며 세월을 날려 보낼 것인가?

 

문진영(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장, 서강대 사회복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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