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시대와 인물] 모든 체제가 다 거부한 최고의 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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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시대와 인물] 모든 체제가 다 거부한 최고의 만담가
  • 편집국
  • 승인 2003.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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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출(申不出)


태극기 모독 설화사건
“태극기 중앙의 붉은 빛은 공산주의이고 파란색은 파쇼이며 그 주변의 사괘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의 4개 연합국입니다. 이 국기를 만들 때부터 우리 민족은 남북이 갈리고 숙명적으로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어 있었죠.

그런데 만일 저 태극기 가운데에다 물을 확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빨간색이 주욱 흘러내려 파란색을 덮게 되겠죠. 우리 속담에 ‘큰 코 다친다’는 말이 있는데 코가 더 큰 미국이 결국 쫓겨나게 될 겁니다.”

1946년 6월 11일 밤,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풍자 코미디언’인 신불출이 조선영화동맹과 일간 <예술통신>이 주최한 ‘6·10만세운동기념 연예대회’에서 행한 ‘실소사전(失笑辭典)’이란 만담의 한 토막이다.

이 만담 직후 미군정은 포고령 위반혐의로 신불출을 군정재판에 회부, ‘체형 1년 혹은 벌금 2만원’을 언도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조선 최초, 최고의 만담가인 신불출은 우리의 대중예술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일제시대, 신난다(申難多)에서 신불출로
1905년 경기도 개성에서 천민 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살 무렵 토월회 출신의 양백명이 주도한 극단 연구생으로 들어가면서 연극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지독한 독서광이자 타고난 말재주꾼이었던 그는 무대에만 나가면 실수를 하곤 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예명까지 ‘어려움이 많다’는 신난다였던 그는 계속해 무대에 오르지 못하면서 ‘무대에 못 나가는 사람’ 신불출이 되고 만다.

그러나 거듭된 노력 끝에 30년대 초 단성사 전속극단인 ‘신무대’의 배우로 발탁돼 <동방이 밝아온다>는 연극에 출연하게 되었고, 마지막 대사인 “동방이 밝아 오니 잠을 깨고 일터로 나가자”를 “동방이 밝아 오니 두 주먹 불끈 쥐고 대한독립을 위해 모두 떨쳐 일어나자”로 바꿔 경찰서로 연행돼 모진 고초를 받게 된다.

“다시는 서울에서 무대에 서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난 그는 ‘사대문 밖’이라는 뜻의 문외(門外)극단을 조직해 서울 외곽을 돌며 세태풍자 연극을 계속했다. 연행되면 “약속대로 서울에서는 공연하지 않았다”고 맞서던 그는 자신을 전담하는 일본 고등계 형사가 시종 따라다니게 되자, 30년대 중반 혼자서 단촐하게 돌아다니며 타고난 말솜씨를 보일 수 있는 만담꾼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후 그는 타고난 말솜씨와 날카로운 세태풍자로 일제치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월북, 그리고 숙청
태극기 설화사건 이후 끊임없이 죄어드는 감시망을 피해 47년 단신 월북한 그는 6·25전쟁 중인 50년 7월부터 8월까지 인민군 문화선전대 책임자로 서울중앙방송에서 선무방송을 하기도 했으며, 57년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및 공로배우, 61년 문예총 직속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 등 만담꾼으로는 이례적으로 북한 당국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신불출은 그러나, 그답게 북한의 통제사회를 풍자하는 만담을 공연했다는 이유로 3차례에 걸쳐 구속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모란봉에 올라가 눈을 감고 돌을 던지니 장에 맞더라. 두 번째도 장, 세 번째도 장…… 도대체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을 빼면 또다른 장(長)은 무엇이냐”는 식으로 통제사회의 각종 우두머리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결국 신불출은 62년 작가 한설야 등을 ‘종파주의자’, ‘복고주의적 반동분자’ 등의 혐의로 숙청할 때 같은 혐의로 공직을 박탈당하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의 생사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세치 혀 하나로 온 장안을 웃기고 울렸던, 조선 최초이자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예술가인 그를 그가 살아온 모든 체제는 다 거부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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