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성역-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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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성역-언론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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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전투에 지면 항복하지 않고 집단 자살을 한다든지, 자살 비행대로 함대에 돌진하는 일본인의 행동을 미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44년 미국 국무부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1887~1948)에게 이런 독특한 가치관에 대한 연구를 위촉하였다.

그녀는 1946년 각고의 노력 끝에 『국화와 칼』이라는 일본 문화의 틀을 탐구한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을 이해하는 최고의 길잡이로 꼽힌다.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주관적 또는 피상적인 ‘나의 잣대’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잣대’로 일본의 역사에서 생성된 문화양식을 찾아내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에 태어난 인류학이란 학문에서 이 책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고서 성찰만으로 이 역저를 펴냈다는 것이다. 수년 전 언론인 전여옥씨가 일본 특파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2년 반을 일본에서 살면서 ‘한국식 잣대’로 일본을 느낀 후 일본이 별 것 아니라고 단정했다. 일본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듯한 책제목부터 논란이 일었고 어쨌든 일본을 얕잡아 보고 싶은 국민 정서와 코드가 맞아 얄팍한 내용임에도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녀는 여러 언론에 칼럼을 쓰면서 ‘나만의 잣대’로 비아냥대는 습관을 여전히 갖고 있다. 성찰이 부족한 이 책을 황색주간지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은 전여옥씨에게는 억울할지 몰라도 실제 ‘잣대를 선택하는’ 격조의 차이가 실로 세계적 언론과 우리 주류 언론 사이의 간극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1일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가 작문과 표절 등 파렴치한 보도 행태를 저질러온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기자가 집에 있으면서 취재 현장에 나간 것처럼 꾸며 출장비를 허위 청구해 사기 혐의까지 조사받게 됐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힌 이 기자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해 장문의 사과문을 게재해 우리 언론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 언론의 현주소는 심층보도를 통해 성찰하기보다는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독자의 흥미 끌 것인가에만 군침을 흘렸고, 거짓 보도임이 명백히 밝혀져도 이를 시인하거나 책임자를 인책하는 자기 반성이 없었다.

우리 주류 언론들은 색깔이 다른 민주화 세력에게 왜곡과 짜깁기와 날조 같은 ‘멋대로 잣대’를 들이대는 폐해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생떼를 쓰는 것은 주류 언론 사주들이 유신시대 권력에 무릎 꿇은 것과 그 사주들이 광주 항쟁이후 언론사를 강제 통합할 때 권력과  유착해 살아남은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언론들이 모진 탄압을 당할 때 지금의 주류 언론은 오히려 비대해졌고 그런 권력을 세습해 족벌이라는 성역을 쌓았다. 여기에 기생하는 주류 언론인들은 언론 사주의 성역을 보호하기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족벌언론은 80년의 광주를 항쟁이 아닌 사태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검찰 개혁을 성찰하기 보다 강금실 장관이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은 TV 모습을 비꼰다. 언론을 개혁하려는 이창동 장관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국회에서 답변하는 모습을 부각시키며 거만하다고 몰아친다.

국민에게 지탄받는 국회 권위를 환기시키고자 평상복을 입고 등원한 유시민의원에게 비아냥거리는 전여옥같은 자세가 언론의 현 실정이다. 작은 규칙과 예의범절에는 소리 높여 호통을 치면서 다른 이의 눈물과 신념에는 입을 꾹 다무는 성찰없는 ‘참을 수 없는 훈계의 가벼움’으로 사회 여망을 어물쩍 피해가고 있다.

개혁이란 어떤 의미에서 성역을 깨는 작업이다. 언론은 성역을 만들어 ‘사주의 잣대’로 사회를 재단하는 버릇이 오히려 완고해지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 국정원도 서슬 푸르던 검찰도 이제는 성역의 대상이 아니다. 대통령조차 ‘각하’이던 시절이 호랑이가 담배 먹던 이야기가 되었다.

이처럼 사회 모든 부분에서 성역이 없어지는 지금, 언론만 유독 언론의 성역 깨기를 언론 탄압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제 언론은 개혁을 비아냥거리지 말고 성찰하는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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