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연지정제와 한국 의료제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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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연지정제와 한국 의료제도의 현실
  • 김철웅
  • 승인 2008.08.0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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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복지국가 Society(www.welfarestate.net)에 김철웅 정책위원이 기고한 칼럼의 전문이다. (편집자)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준비하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회적 논란을 만들었다.

오렌지 발음을 기점으로 제기된 ‘영어 몰입 교육’ 논란을 시작으로 새 정부의 많은 정책 이슈들이 세밀한 검토나 심각한 고민 없이 그저 과거 정부와 반대되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언론을 장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폐지 또는 완화할 것을 인수위원회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간에 흘러나왔다.

이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기세등등한 집권세력을 향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무력한 시간만 흘러갈 따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이상한 낌새가 나타났다. 국민건강보험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자 공공적 가치라는 논의가 오가고, 많은 누리꾼들의 공감을 얻어갔던 것이다.

마침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지키자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공보험인 건강보험을 단숨에 무너뜨리려는 급진적 의료시장주의들의 정책적 무기였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폐지’를 저지하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싫어하는 ‘건강보험 관련 괴담’은 이렇게 생성된 것이었다.

집권세력이 혐오하는 이 ‘건강보험 관련 괴담’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폐지’ 반대 온라인 서명을 거쳐 삽시간에 오프라인으로 옮아갔다.

4월 총선을 앞둔 야당에게는 호재였고, 한나라당에는 악재였다. 범야권과 시민사회는 연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폐지’ 반대를 외쳐댔다. 한나라당조차 인수위원회와 청와대에 원망의 메시지를 보내다가 끝내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유지 방침을 내놓게 된다.

이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계속적으로 당연지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던 대한의사협회는 "당연지정제도 유지 방침을 밝힌 정부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다"며 "의료사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당연지정제도를 고수한 채 새로운 선택의 길을 막아버린다면 한국의료는 영원한 퇴보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총선을 전후한 2008년 상반기에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라는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가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쟁점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는 국민건강보험법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에 개설된 모든 의료기관은 당연히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료서비스 제공 계약을 맺도록 한 제도다. 이 제도 덕택에 국민건강보험의 법률적 당연가입자인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전국의 어느 의료기관이라도 건강보험증만 들고 가면 건강보험 진료를 당연히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온 국민이 이렇게 혜택을 보는 이 좋은 제도를 우리나라 의료계는 대단히 싫어한다. 왜 그럴까?

원래 계약이란 쌍무적인 것이다. 그런데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이유 불문하고 국민건강보험이 정하는 통제된 의료수가를 수용하면서 건강보험 환자를 규정에 따라 진료하라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쌍무적 계약의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년 전에는 의료계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낸 적이 있었다. 대단한 논란 끝에 2002년 헌법재판소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는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지금은 과거와 상황이 더러 바뀌었으므로 위헌소송을 다시 제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의료제도가 가장 닮아있는 대만도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가 아닌 ‘건강보험 요양기관 계약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약 96%의 의료기관들이 건강보험당국과 일일이 계약을 맺는다.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는 의료기관은 크게 두 부류인데, 하나는 국민의료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건강보험당국이 계약을 거절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미용과 성형 등의 일부 소형의료기관이 자발적으로 건강보험 계약을 거절한 경우인데, 전자의 경우에 처한 의료기관은 환자가 없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만에서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의료기관들이 건강보험과 일대일의 자발적 계약관계를 맺고 있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이처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가? 슬픈 이야기지만, 이는 우리나라 의료계의 독특한 현상 때문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 의료계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가 위헌이라며 위헌소송을 낸 적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의료기관까지 모두 건강보험에 당연지정으로 묶어 놓는 것은 과도한 사회적 규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왜 헌법재판소는 의료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 의료서비스를 공급하는 의료기관의 90% 이상이 민간인데, 의료계가 집단적으로 또는 상당부분이 건강보험과의 계약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면, 국민의료 이용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조건이 달라졌는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간의료기관의 비중은 헌법소원 판결이 있었던 6년 전보다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의료계가 집단적으로 건강보험과의 요양기관 계약을 거부하거나 상당부분이 건강보험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전보다 줄어들지도 않았다.

이는 최근까지의 의료계 주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의료계는 줄곧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폐지하고, 대만식의 순수 계약제가 아닌 ‘건강보험 요양기관 집단계약제’를 주장하고 있다. 의료계를 대표하는 단체와 건강보험당국이 의료수가 수준과 관련 의료제도를 해마다 집단적으로 계약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의료수가 계약 등이 원만하게 타결되지 않게 되면, 국민의료 이용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큰 재앙이 오게 된다. 그러므로 의료계의 이러한 주장은 사회적 수용성이 별로 없다.

만약, 의료계가 대만식 ‘건강보험 요양기관 계약제’를 들고 나온다면? 최소한 대한의사협회가 이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의료계에 더 불리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문제나 흠집이 있는 의료기관은 계약관계에서 배제되어 건강보험 환자를 볼 수 없게 되는데, 이러고도 살아남을 의료기관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만식 ‘건강보험 요양기관 계약제’는 의료계에는 불리하고, 건강보험당국에게 유리한 제도다.

그래서 일부 건강보험 당국자나 일부 전문가들은 대만식 ‘건강보험 요양기관 계약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당연지정제도는 어쩌면 이 양자의 중간쯤에 놓여있는 사회적 정치과정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우리 시민사회에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가 지고지순한 사회적 가치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사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는 어떤 조건의 결핍 때문에 한 시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어떤 제도 유형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우리사회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승격되어 버렸을까? 이명박 정부 탓이다. 인수위원회 시절과 그 후로 현 정부가 추진하려 애써온 급진적 ‘의료민영화 기획’ 때문이다. 의료민영화를 위해서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폐지 또는 완화하고, 건강보험 당연지정에서 빠져나온 의료기관과 민간의료보험이 짝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유형은 세력을 키워나가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본체다.

그러므로 최소한 지금의 우리나라 의료 현실과 조건 하에서는 당연지정제도의 유지가 최선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에 영리법인 병원이 들어서면 여기도 예외 없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분을 해석할 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국민이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한 조건에서 건강보험 환자를 보지 않고도 살아남을 의료기관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다.

영리법인 병원도 그리 예외는 아니다. 이들 영리법인 병원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면, 이들 병원은 건강보험 환자를 수익의 기본 원천으로 삼고, 돈이 되는 영리환자도 보고, 건강보험 비급여 진료를 더욱 개발하게 된다. 기존의 비영리병원에 비해서는 우월한 조건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영리법인 병원이 급속히 늘어나게 된다.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 당국이 영리법인 병원에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를 적용하겠다는 것은 결국 제주도민과 국민을 위한 조치라기보다는 영리법인 병원을 제주에 급속하게 확대하려는 기획으로, 의료자본과 보험회사들을 위한 조치이자 의료민영화 기획의 일환임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제도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해당 제도의 특성과 해당 시기의 전반적 조건 등을 모두 따져보아야 한다.

이 사례에서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가 지고지순한 사회적 가치이기는커녕 의료민영화 기획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김철웅(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건양대 의대 예방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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