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 달리자] 건치가 무슨 생선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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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 달리자] 건치가 무슨 생선이예요?
  • 김원범
  • 승인 2008.08.17 00: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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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수필 대장정]8- 김원범(서울 85졸, 제주도치과의사회 부회장)

제주도는 참 좋다!

그냥 공치사이거나 내 고향이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제주도는 참 좋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거리는 관광객들의 렌터카로 넘쳐난다. 내가 아는 몇몇 치과의사분들은 아예 골프텔을 분양받아서 주말이면 골프 치러 왔다가곤 한다. 사람들은 큰 맘 먹고 제주에 놀러 오지만, 나는 언제든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조용하고 멋진 곳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내 진료실에서는 한라산 백록담이 보인다. 겨울에는 눈덮인 정상의 모습이 일상의 답답함과 피로를 씻어주기도 한다. 그런 제주에서 내가 태어났고, 지금 살고 있으니, 나는 복받은 놈이다.
 
탈출이냐? 도피냐?

내가 고향 제주로 귀향한 것은 1990년 초이다. 청년치과의사회를 거쳐 건치가 만들어지고, 사무국에서 일하면서 건치회보 제작이나 보건의료운동론에 빠져 지내던 내가, 1989년 하반기 어느날 갑자기 귀향을 결심하고 선배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던 것이다.

그 이유나 명분이야 어쨌든 사람 부족에 허덕이던 당시의 건치 집행부에게 나는 졸지에 나쁜 놈이 될 게 뻔했다. 안그래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모든 집행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치과일보다도 건치 일로 정신없이 허덕이던 바로 그 때, 나는 엉뚱한 결심을 해버린 것이다.

탈출이냐, 도피냐? 지금도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솔직히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밤샘회의에 지치기도 했지만, 실상은 보건의료운동이라는 명제에 다소 지쳐 있었다는 게 보다 솔직한 심정일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내가 했던 가장 큰 변명은 지역운동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였다.

건치가 무슨 생선이예요?

그래도 건치에 대한 일말의 의무감과 사명감이 남아있던 터라 동내의 치과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건치 홍보 좀 할 요량으로 말을 걸었다.

“고원장, 너 건치라고 아냐?”
“그게 뭔데요? 처음 듣는 생선 같은데, 무슨 생선 말린 거예요?”  
아차차, 여기는 제주도다. 온갖 ‘치’자가 붙은 다양한 생선들이 싱싱하게 시장 좌판과 식당과 우리의 밥상을 뒤덮는 제주도이다! 

나름대로는 재치를 부린답시고 엉겁결에 대답한다.
“건강에 좋은 생선은 다 건치야!!” 

마일리지에 대한 착각

처음 두세 해를 매주 서울로 들락거렸다. 임상세미나 공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건치 선배들에 대한 미안함과, 건치회보 편집부 업무에 대한 나름대로의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한 사람이 빠지면 누군가는 그 역할을 대신할 구멍을 채우게 되어 있는 법. 주변이나 나의 부족한 걱정과 달리 싱싱한-지극히 제주도적인 표현- 후배들이 멋있게 그 자리를 훌륭히 채워주었다.

그 몇 년 동안 항공료로 쓴 돈이 얼마인지는 계산을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덕분에 지금도 쌓인 마일리지가 많아서 유럽왕복티켓 몇 장은 공짜로 생길 수 있다는 사실로 억지위로를 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마일리지 쌓는 것만큼 어리석은 계산방식도 없다)

신문쟁이가 되다

이짓 저짓을 해보았다. 지역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상담소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지역의 노동자라는 것이 운수, 호텔, 병원노조가 주인데 노동조합 분들의 나이들이 대부분 삼촌뻘이고, 이래저래 아는 관계들에 둘러 쌓여 쉽지가 않았다. 

또 시민단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서귀포의 현실 때문에 지역포럼을 만들기도 했다. 포럼 초창기는 지역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어서 좋은 출발을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투를 둘러싼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여 결국 이것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95년 초 서귀포에서 지역신문을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몇몇 어른들께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데, 하나같이 반대하신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나쁜 놈이 되는 게 신문’이고, ‘친구는 잃어가고 적만 생기는 게 신문’이란다. (지나고 하는 얘기지만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당시 젊은 혈기에 가득차 있던 내가 그런 조언에 귀 기울일 수 있으랴?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은 무엇보다도 지역의 의식변화였다. 할 일은 쌓였는데, 우리들의 의식이 너무 낙후되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현실인식이었다.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마치 농촌계몽운동처럼 생각을 했으니...)

그렇게 해서 1996년 2월 서귀포신문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12년이 넘는 기간을 재수 없게도 도망치지 못하고 그 속에 붙잡혀 허덕이고 있다. 

졸지에 전국무대에서 놀아보다

신문쟁이로서의 제 2의 인생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전국의 지역신문들 중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던 몇몇 신문사들이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갖게 되면서 전국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바른지역언론연대’가 만들어졌다.

서귀포신문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나는 선배신문사들로부터 이런저런 도움도 얻고 한 수 배울 요량으로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다음해 갑작스런 회장의 사퇴로 정말 얼렁뚱땅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전국 20여개 신문사를 모아놓기도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제주도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다시 나의 잘못된 계산방법이 시작되었다. 항공료와 치과 비우는 데서 오는 경제적 손실보다도 마일리지 쌓는 재미로 또 하늘에 돈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거나 일주일에 한두번씩 언론노조와 언론재단, 국회 왔다갔다가 시작되었다. 제주도 서귀포 촌놈이 전국무대에서 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렇게 5년을 보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때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지금 지역신문발전지원법이 시행되고 기금과 위원회를 통해 많은 지역신문들이 그 덕을 보고 있다. (물론 이명박정부가 이를 없애려고 기를 쓰고 있는 중이어서 그동안의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큰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아이들 문제로 또 도마 위에 오르다

우리 아이들 얘기를 좀 해야겠다. 오랜 가족회의와 토론 끝에 2002년 초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안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홈스쿨링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제주에서는 최초이고,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그리 많지 않던 시기였다. 주변의 반대와 우려어린 조언들이 계속되었다.

저 친구는 치과의사라는 양반이 엉뚱하게 신문쟁이한다고 툭하면 치과 까먹고, 식구들 고기 안먹이면서 굶어 죽이려 들더니, 이젠 아예 아이들 학교까지 안보내는구나. 서귀포라는 작은 지역에서, 그것도 이름이 졸지에 좀 알려진 나는 연일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오르락거리며  사시미도 되었다가 튀겨지기도, 삶아지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찾아서 잘도 한다. 친구랍시고 나보다 더 나이가 든 사람을 집에 초대하기도 한다.

당신, 치과의사 맞아?

이제, 마무리. 어쩌면 내가 지내온 시간들은 치과의사라는 직업 속에서라기보다는 그냥 자유분방한 삶이었지 싶다. 주위에서 그런 말을 자주 듣기도 한다 “당신, 치과의사 맞아?”

그러나 스스로를 소개할 때 신문쟁이나 채식주의자나 홈스쿨러의 학부모가 아니라 치과의사로 소개하는 걸 보면 나는 치과의사가 맞다. 

이제 나도 나이 먹어간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내가 갖는 자유분방함을 끌고 나가기 위한 열정이 서서히 줄어가고 점점 편한 것을 찾게 되니 말이다. 이제는 퇴근 일찍 해서 집에서 잡초 뽑는 일이 더 즐겁다.

그러나 슬픈 현실. 사회는 나를 그렇게 가만 두지 않는다. 정작 자유의지를 갈망하는 내가 일상에서의 자유를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오늘을 버티고 있다. 언제면 나에게 한가로운 자유의 시간들이 펑펑 쏟아지게 될지 기대해 보지만, 막상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또 뭔가를 꾸미려 들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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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14:48:24
김원범선생.. 화이팅!!...
건치인들의 지역 운동을 모아보면 참 대단할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인게 서귀포의 김원범선생 활동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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