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의 신화에서 사랑을 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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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의 신화에서 사랑을 긷다
  • 하순애
  • 승인 2008.10.0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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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28일 <내 안의 신화-서귀>展-홍진숙 초대전

평화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오는 8일부터 28일까지 평화공간 space*peace에서 <내 안의 신화-서귀>展-홍진숙 초대전을 개최한다.

본지에서는 이번 홍진숙 초대전의 기획자 하순애 철학박사의 초대의 글을 전문 싣는다.

 

▲ 원초적 시간과 공간

서귀포. 그 이름은 우리를 문득 설레게 하고, 더러는 애잔하게 했다가 또 더러는 우리로 하여금 몽상에 젖어들게 한다. 그것이 한국 남단의 섬 제주도 끝자락이라거나, 요절한 천재화가 이중섭이 그곳에서 <서귀포의 환상>을 그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더욱이 사람살이의 고락과 애환을 가슴 한 구석에 묻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서귀포에서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비스듬히 드러누운 듯 그 교교하게 흘러내린 한라의 산자락, 그 수려하고도 풍성한 자태, 섶섬, 문섬, 범섬 등 곱디고운 섬 안의 섬, 게다가 온갖 상념에 날개를 달아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훌쩍 건너뛰게 하는 가없는 남쪽 바다, 이 모든 서귀포의 숨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꿈이다. 서귀포가 아무리 관광 1번지의 휘황한 옷을 걸친다 해도, 서귀포는 여전히 날(生)것이고, 그래서 ‘꿈꾸는 서귀포’이다.

제주시에 거주하는 홍진숙이 한라산을 넘어 시나브로 서귀포를 드나든다고 했을 때, 그 걸음의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만했다. 꿈꾸는 서귀포에서 그녀는 또 다른 꿈을 꾸고자 했을 터이다.

더욱이 제주무속에 관한 공부를 여러 해 했던 홍진숙에게 수많은 신당과 풍부한 신화가 전해 내려오는 서귀포는 그녀의 미술작업에 소중한 텍스트였을 것이다.

날 것으로 빛나는 천연의 색깔과 그 날것의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온 신의 이야기, 이 둘은 오랜 시간동안 하나로 뭉뚱그려져 서귀의 삶을 지탱해왔듯이, 홍진숙에게도 이 둘은 하나로 가슴에 새겨진 모양이다. 그래서 <내 안의 신화- 서귀>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신화는 ‘처음’을 말한다

‘서귀’라는 몽상의 땅이름에 기댄 홍진숙의 작업은 서귀에 국한되고 있지 않다. 그녀는 ‘서귀’와 ‘신화’를 엮어내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여정을 그린다. <신화의 섬>, <始原의 섬>, <원초적 시간과 공간>, <신화의 탯줄>등 일련의 작품이 그것이다.

신화를 어떻게 정의하든, 신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온 그 이야기는 사람이 세상에 관해 이해해야 할 ‘처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신화는 ‘원초의 때에, 시원의 신화적인 때에 생겼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엘리아드)이고, ‘태초의 사건 혹은 최초의 사실에 대한 전승된 이야기’(리꾀르)이다.

▲ 시원의 섬
처음의 사건이기에 신화는 ‘신성한 역사’인 것이고, 그 사건의 의미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삶의 터 한 가운데 처한 사람들의 가슴에 되새겨지는 것이기에 신화는 진실성을 지닌다.

홍진숙이 《내 안의 신화 -서귀》라는 전시에서 <신화의 섬>, <始原의 섬>을 끌고 들어온 것은 신화가 전승되어 온 기나긴 시간의 여정과 신화를 향한 그녀 자신의 사유의 여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리라. 

보라. 바다 한 가운데 외따로 우뚝 솟아 사방팔방 바람살을 받아내야 하는 이 섬을 신화가 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으랴. 제주사람들이 이 섬을 신의 몸이요 신의 뜻으로 느꼈기에, 섬은 삶을 꾸려나갈 온전한 터가 된 것이다. 그 느낌들이 섬 곳곳에서 아직도 숨을 쉬고 있어서 제주는 <신화의 섬>이고 <始原의 섬>이다.

한편 이 땅에는 지금도 그 신화를 붙잡고 자신들의 실존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많은 제주사람들이 있다. 정초(正初)이면, 곳곳의 마을 신당에는 신에게 기원하는 사람들이 오밤중부터 모여 앉아 오롯이 가슴을 하나로 모은다.

이들은 신화의 진실성을 간절히 믿음으로써 홀연히 일상적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이들이 신성성으로 합일되는 그 순간, 그곳은 신화적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되고, 신화의 진실성을 믿는 순간, 그곳은 원초적 시간과 공간이 된다.

▲ 신화의 탯줄
무속을 공부하던 홍진숙이 당굿에 참여한 그 시간의 체험을 강렬한 컬러로 형상화한 <원초적 시간과 공간>은 신화적 심성에 대한 그녀의 깊은 이해를 읽게 해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삶을 이어온 이 땅의 할망과 하르방, 그리고 제주섬에서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할망’과 ‘하르방’은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니다.

신을 섬기기에 신의 이야기를 이어오는 것이고, 신이기에 신의 이야기가 꾸려지는 것이니, 서로 다른 이름이면서 또한 같은 이름인 ‘할망’과 ‘하르방’은 모두 신화를 낳은 탯줄이다.

<신화의 탯줄>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표제를 단 작품에서 우리는 삶의 신비를 은밀히 엿본다.

서귀의 몽상은 사랑이다.

삶의 신비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사건은 단연 ‘사랑’이다. 사람의 온갖 욕망도, 온갖 감정도, 또 사람이 사람과 얽어지는 온갖 관계도, 심지어는 사람이 신에게 기대는 그 온갖 열망도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집약된다. 그런 만큼 ‘사랑’에는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 분노와 갈등, 화해와 조화, 생성과 초월의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중첩된다.

사랑의 이 모든 모티브들이 고스란히 담긴 신화가 서귀에서 전승되고 있다. 바로 서귀동과 인접한 서홍동, 동흥동에 좌정한 본향신(本鄕神)인 바람웃또,고산국,지산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선 이 신화의 내용을 간략히 보자.

바람웃도가 황토나라를 방문하여 그곳 대신의 집에 머물렀는데 우연히 대신의 딸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다. 바람웃도가 어렵사리 청혼을 하여 대신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지만, 막상 첫날밤 신방에 들고 보니 신부 고산국의 얼굴이 대단히 박색이었다.

▲ 서귀신화-어긋난 사랑
자신이 반한 처자가 대신의 작은 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바람웃도는 처제를 꾀어내어 황토 나라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남편과 동생이 불륜을 맺어 도망 가버리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산국은 남장을 하고 천근짜리 무쇠 활과 무쇠 화살로 무장을 갖추고선 두 남녀를 죽이겠다고 하늘에 맹세하고 바람웃도와 동생을 뒤쫓았다.

고산국이 축지법을 펼쳐 바짝 뒤따라오자, 너무나 위급해진 바람웃도는 한라산 영실지경에 이르렀을 때 풍운조화를 부려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다. 고산국이 절벽 꼭대기에다 죽은 구상나무 가지로 닭의 형상을 만드니, 닭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이 훤히 드러나면서 고산국은 두 남녀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 대하고나니 차마 남편과 동생을 죽일 수가 없었다. 배신에 대한 분노와 하늘에 한 맹세로 수없이 갈등하는 고산국.

그러나 마침내 고산국은 마음을 돌려 자신이 먼저 대막대에 돌을 끼워 던져 떨어진 곳인 서홍리를 차지하고, 남편인 바람웃도는 하서귀에, 동생에게는 성을 지가로 바꾸게 하고 동홍리에 좌정시켰다.

홍진숙은 서귀동 신화를 일련의 작품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서귀신화 연작은 신화의 첫머리 내러티브인 <아방국은 홍토나라, 어멍국은 고산국입네다>로 시작하여, <만남의 인연>, <어긋난 사랑>, <고난의 길>, <갈등>, <용서와 화해>, <땅의 조정> 그리고 <본향>으로 이어진다.

이미 홍진숙은 《섬, 그 안의 신화》개인전과 단체전인《제주신화전》에서 신화의 스토리를 상징적으로 재구성해 내는 작품을 여럿 보여 왔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다시 확장시키고 있다.

하나의 작품에 신화적 스토리와 신화적 상징을 구성해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작품으로 신화의 스토리를 고스란히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소리의 강약과 높낮이를 맛깔나게 구사하듯이, 홍진숙은 <서귀신화> 일련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판형, 이미지, 컬러, 터치를 구사하면서, 그야말로 ‘회화적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문득, 사람살이의 그 질펀한 자리들을 동감(同感)에 겨워 찾아다니던 홍진숙이 바람웃또․고산국․지산국 이야기를 ‘회화를 통한 스토리텔링’의 첫 작품으로 택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 서귀 신화-용서와 화해
이 세 신(神)의 이야기만큼 사람살이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우연한 만남과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제 삼자의 난데없는 출현, 그로 인한 고통과 고난의 당연성. 이 뿐이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그 분노를 누르고 다시 솟아나는 용서 또한 사람살이를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다. 결국 사랑의 그늘에서 빚어지는 고통과 갈등, 분노와 용서 역시 사랑의 다른 얼굴이고, 바로 이 다른 얼굴이 궁극적으로 사랑을 지켜내고, 사람살이를 구원하는 힘인 것이다.

그래서 서귀신화-바람웃또․고산국․지산국 이야기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삶의 체험의 세계이고, 사랑과 고통에 대한 너무 생생한 메타포이다. 다시, 그래서 서귀신화-바람웃또․고산국․지산국 이야기는 여전히 진실하고, 서귀신화의 스토리가 전개된 그 시간은 죽지 않는 신화적 시간으로 늘 우리에게 재생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홍진숙의 소재 선택이 탁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더러 거칠고 더러 난삽한 그녀의 ‘회화적 스토리텔링’에도 비평의 날을 무디게 할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세계가 사람을 살게 한다

<서귀신화>에 이어 홍진숙은 서귀포시 보목동 본향당신 ‘조노기한집’에도 주목한다.

할로영산 백록담에서 솟아난 ‘조노기한집’은 자신의 처씨[부인]에게서 죈경내(돼지고기냄새)가 나니, 그 연유를 다그친다. 처씨의 대답은 가히 ‘사건’이다. 보자.

괴기가 팟싹 먹고판(고기가 바싹 먹고 싶어)
상돗통에 기여들언 보니(上돼지우리에 기어들어가 보니)
되야지가 용베겔 베와(돼지가 큰 베개를 베고)
용을 자고 이서(용잠을 자고 있어)
갱맹지를 손에 감아 죄고(강명주를 손에 감아 쥐고)
항문으로 손을 드리아(항문으로 손을 들이밀어)
간내 식식 양외 식식을 빼어 먹어.(시원하고 좋은 간과 양을 빼어먹었다)

굳이 신화 상징에 대한 해석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서사에 담긴 메타포, 이 거침없이 적나라한 메타포는 경탄을 일으킨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항문으로 손을 들이밀어 간을 내어먹다니! 이 춤추는 메타포의 의미는?

▲ 조노기 한집 처씨
그런데 홍진숙의 해석 또한 거침이 없다. <조노기한집 처씨>에서 여신의 적나라한 욕망은 생명을 잉태하는 나무 혹은 꽃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대세계 전역에서 암퇘지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다는 점, 여성은 외적 세계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생명이 흘러 들어오는 주술적 출입구로 상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홍진숙이 작품에서 거침없는 욕망과 거침없이 자라나는 생명의 나무를 하나의 화면에 중첩시킨 것은 여성의 몸이 지닌 창조적 주술을 그려낸 것이리라.

홍진숙이 사랑과 고통의 생생한 메타포로부터 욕망과 생명의 판타지로 시선을 옮긴 것은 그것 역시 ‘사랑’이라는 큰 이름으로 용해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되짚어보면, 사랑도, 욕망도, 생명도, 사람의 얄팍한 인지력으로는 도무지 다가설 수 없는 판타지이다. 그러나 그 판타지의 세계가 있어, 고단한 사람살이에도 사람은 가슴을 열어 살아가는 것이다.

가슴을 열고나면, 판타지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안에, 내 안에 판타지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화 그 자체가 무슨 설득력이 있을까. 오히려 우리 안에 숨쉬는 판타지가 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번역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징조가 홍진숙에게서도 읽혀진다. <배염줄이 일뢰중>, <나주 금성산 애기씨>, <호근을 토주본향>, <옥저부인..> 등 마을 마을에서 신앙되는 신을 형상화하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그녀가 신화를 자신의 가슴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 내 안의 신화_달의 바다1
다시, 서귀에서 꿈을 꾼다

<내 안의 신화> 연작, 이것은 드디어 홍진숙의 가슴에서 일렁이는 판타지의 말이다.

고통과 불행의 순환 속에서도 사람살이의 낙관적인 전망을 일러주는 ‘달의 신화’를 형상화한 <달의 바다>는 온전히 신화적 몽상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작업한 것이 <달의 바다>라는 그녀의 말은, 죽음마저도 삶의 축에서 읽어낸 신화적 판타지에 닿아 있다.

달은 신화적 시나리오의 전형이다. 달이 이지러지고 다시 차오르는 듯이,  그 어떤 고통도, 비극도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언제나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 언제나 ‘위대한 반전’이 일어난다는 것, 그 어떤 대립도 감응되고 소통된다는 것이 달의 신화이고, 이것이 바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꾸어온 꿈이다.

<신화의 섬>으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은 <내안의 신화>로, 그리고 <내안의 신화-서귀의 꿈>으로 귀착되고 있다.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홍진숙의 작가적 감성이 서귀의 자연과 그 자연 속에 품어 내려온 신화에 말을 건넨 것인지, 서귀라는 땅과 그 땅의 신화가 홍진숙의 가슴을 열어젖혔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쩌면 만나고 사랑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애틋한 그 고난의 여정은 땅에서도, 신화의 세계에서도 또 작가의 가슴에서도 모두 한 빛깔이고, 원래 하나였는지 모를 일이다.

동시에 신화라는 판타지의 세계와 사람살이에 내재하는 판타지 그리고 그녀가 자아내는 회화적 판타지가 모두 원래는 하나였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긴 여정 끝에 홍진숙은 한 숨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그 숨고르기가 닻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회화적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반역의 시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신화의 의미에 족쇄가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제주신화를 소재로 하는 그녀의 작업에도 결코 족쇄가 채워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서귀에서 그녀가 꾸었던 꿈이 또 다른 꿈을 잉태하기를 희망한다. 인간 생명의 신비적 원천이 바로 ‘꿈꾸는 것’ 아닌가.

하순애(철학박사/ 《제주신화전》기획자)

 

홍진숙(洪辰淑)

1985년 세종대학교 회화과 졸업
200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 졸업

개인전
1995년 제1회 개인전‘생활일기’ (세종갤러리/제주)
1997년 제2회 개인전 (고즈겔러리/제주, 콘틴넨탈 갤러리/ 삿뽀로)
1999년 제3회 개인전‘바람의 노래’ (세종 갤러리/제주)
2002년 석사학위청구전 (홍대 현대미술관/서울)
       제4회 개인전 ‘自然-스스로 그러하게’ (문예회관 전시실/제주)
2005년 제5회 개인전‘섬, 그 안의신화’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문예회관 전시실/제주)
2006년 오픈스튜디오 (홍갤러리, 판화공방/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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