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시대와 인물] 최초의 고공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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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시대와 인물] 최초의 고공농성!
  • 편집국
  • 승인 2003.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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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위의 강주룡’을 아십니까?


1931년 5월 28일 동이 트는 5시 10분 쯤, 산책을 나온 평양 시민들은 을밀대 지붕 위에 한 여성이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12미터 저 지붕까지 올라가 앉아 있을까.

그 여자는 평원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과부 강주룡 이었다. 임금을 내리겠다는 회사의 일방적인 통고에 맞서 파업을 감행하던 그는 을밀대 위에서 9시간 동안 목이 터져라 회사측의 만행을 고발했다.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처음부터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가 시위하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캄캄한 밤에 광목 한 필을 사서 을밀대를 찾아갔을 때, 그의 마음속은 세상과 결별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측이 제멋대로 노동자의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한 것은 5월 16일이었다. 제일 먼저 임금을 깎겠다고 나선 평원고무공장의 싸움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300여 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도 회사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선언하고 한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몰았고, 쫓겨난 강주룡은 죽을 결심으로 을밀대를 찾았던 것이다.

강주룡은 죽음으로 회사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결심했지만,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었나’하는 오해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자.”

그는 온갖 궁리 끝에 광목을 밧줄처럼 이용해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
동이 트자 강주룡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는 한편 2천 3백명 동무들을 위해서라면 한 몸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고, 임금인하를 취소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이 외침을 들은 한 기독교 장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경찰과 소방대원은 강주룡을 끌어내려 평양서에 감금했다. 그는 쟁의가 해결될 때까지는 굶어 죽더라도 밥 한 술도 먹지 않겠다며 완강히 버텼다.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파업 본부로 달려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이 날 저녁, 며칠 계속한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강주룡과 간부 네 명이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여 쓰러졌다.

드디어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임금감하를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49명 모두를 채용하라는 요구는 얻어내지는 못했다. 회사는 파업공과 신모집공을 배분하여 채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강주룡은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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