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꿈] '영광스러운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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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꿈] '영광스러운 승리'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8.10.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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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제1장 역사진실관-(5,6)

 

본 연재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연재글 첫회부터 읽기를 당부드립니다. (편집자)

5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설립하여 국회를 열었다. 그러나 남부 베트남에는 다시 프랑스가 쳐들어온다. 100여 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아무런 자원이 없었던 것이다.

맨 먼저 정부가 한 일은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이때 지주와 민족 자본가들이 굉장히 많이 모아 주었다. 1946년이 되었는데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소련마저 호찌민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호찌민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동구 중국 북한 등 15국에 주권과 독립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하여 외유를 떠난다.

호찌민이 나라를 떠난다는 게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재침략하고 이 신생국가는 기반을 잡지 못하고, 주석 대리 후임 툭 판은 무척 두려웠다. 이때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호찌민 한 사람에 의지하고 있었다. 비행기 트랩에 올라가는 호찌민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석님이 안 계신 이 나라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안에 불변의 것으로 만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다.”(이불변 응만변)』

1945년 7월 포츠담 회의에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할 점령이 결정된다. 북은 중국이, 남은 영국과 프랑스가 점령하기로 했다. 이에 호찌민은 중국에 점령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프랑스와 협상하는 것을 택했다. 그러자 호찌민은 프랑스의 인질 혹은 매국노라는 매서운 비판에 시달렸다. 이때 호찌민은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이라는 말로 자신을 대변했다. 경직하지 않는 유연성을 강조하는 이 글귀를 구수정 선생이 가장 좋아한다고 여러 글에서 밝혔다.

 

6

▲ 험난한 산길을 수십 명이 로프로 몸을 묶고 대포를 끌어올리고 있다.

『남부에 프랑스가 재침략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5~1954)이 일어난다. 1954년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이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를 완전히 패퇴시킨다. 프랑스 입장에서 천혜의 요새인 디엔 비엔 푸는 오목한 분지이다. 프랑스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은 중국의 구식무기를 갖고 싸웠다. 중국에서 무기를 받아와서 수백km 떨어진 이곳으로 옮겼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대포를 허리에 묶고 하루에 50km씩 끌고 왔다. 하루에 밥 반 공기만 먹고서. 그리고 그 대포를 험한 산꼭대기까지 옮겼다.』

1954년 5월 7일 오후 5시 30분 디엔 비엔 푸에서 베트남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승전 1보를 호찌민에게 타전했다. 호찌민은 사자후를 내뿜었다.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식민주의 본국을 무찔렀다.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세계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있는 세력의 승리이다.”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남 인민의 투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었다. 또 억지로 시킨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절대로 지나다닐 수 없는’ 정글을 통해 200문의 중포와 다연발 로켓포를 오로지 사람과 자전거와 조랑말의 힘으로 옮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수많은 남자, 여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보급부대를 짜서 장대에 짐을 매달고 정글 속의 길을 걸었다.

즉석에서 만든 기름 등잔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끝없는 인간 사슬을 이루어 앞사람을 따라갔던 것이다. 보급품의 대부분은 쌀이었다. 한 사람이 지고 가는 양의 10분의 9는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기나긴 행군 도중에 소비했다. 10분의 1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분량이었다. 베트남군과 인민은 원시적 수단에도 불구하고 밀림지대와 삼각주에서 오랫동안 보급선을 유지하는 끈기와 인내력을 발휘해 포위작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인명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저항한 ‘인민의 전쟁’ 바로 그것이었다.

마이클 맥클리어가 지은 ‘10,000일의 전쟁’에는 이렇게 묘사했다. “200문이 넘는 ‘철 코끼리’가 50마일 이상의 정글을 뚫고 도착했다. 초인적인 힘이었다. 오직 인민들의 땀과 힘으로 해낸 것이다. 간헐적인 폭격과 네이팜탄의 위험 속에서 운반책임을 맡은 인민들은 대포와 몸을 로프로 연결해서 끌고 왔다. 한 번에 1인치씩, 하루에 반마일씩, 3개월이 걸린 고행 길이었다.”

 

송필경(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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