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영화를 보면 무법자들이 나온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아니라 법을 무시하고 법이 없는 듯이 사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우리나라 법체계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8인의 헌법 재판관들이 스스로 법체계를 부정해버리고 스스로 무법자가 되어버리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성문법에 기초해 있는 우리나라 법 현실에서 혁명적 상황도 아닌데 느닷없이 불문법인 관습법을 들고나와 무법자들처럼 성문헌법을 무시해버리고 성문헌법이 없는 듯이 그것도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판결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 헌재의 판결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관습헌법이라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을 뿐이다. 오직 8인의 무법자만이 법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관습헌법(아니 무법헌법이 더 어울린다)을 인정한다면 앞으로 어떤 사안이든지 이 무법자들의 최종 판단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관습적인 것은 너무도 많고, 해석하기에 따라 너무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 무법자들이 헌재를 지키고 있는 한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
보수적인 것과 개혁적인 것이 서로 다투고 있을 때 오래 유지되어온 관습적인 것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우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라면 당연히 개혁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말 그대로 관습 만만세, 보수 만만세이다.
물론 관습헌법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더라도 성문헌법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개혁적인 판결을 내렸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오히려 헌재가 그동안의 일관된 보수주의에서 변해가는 시대 상황에 맞게 변신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헌재는 보수적인 관습을 들고나와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개혁하고는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판결해 버렸고, 동시에 과감하게 그동안의 사법소극주의를 벗어 던지고 스스로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으로 변신해 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졌다. 8인의 무법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안 보이는 관습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 버렸다. 무법자들이 판치는 서부 영화에서 모든 선악은 총을 쥐고 있는 무법자들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악한 무법자가 판을 치면 악한 무법자를 무찌르는 선한 무법자도 나온다. 결국 온통 무법자 천지가 되고 만다.
우리나라가 이런 무법자의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헌법재판소법을 고쳐 재판관 구성과 절차를 바꿔야 한다. 판사와 검사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헌법재판관들을 헌법학자나 헌법전문가와 식견 있는 지식인 또는 정치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실수는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헌재가 최고의 권력기관의 하나라면 다양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적인 구성 절차와 인적 구성이 필수적일 것이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구호이군요.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대학가를 메아리치고 정치권은 개헌을 화두로 삼을 때 학생운동의 전투적인 일부 그룹(이름도 그래서 제헌의회그룹)의 구호였지요. 그 때 가투를 나갔을 때 어떤 아자씨가 한참을 주의깊게 들어보더니 쟤들은 개헌이 아니라 제헌이래... 하던게 생각나는군요.
레닌의 저작들에 영향을 받은 어설픈 주의자들이었지만, 구호의 올바름 여부보다 그런 문화와 감수성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큰 구도에서의 민주주의를 앞당겨왔다고 생각합니다. 구호 하나하나의 내용은 부차적이고 그런 구호들의 문화와 분위기가 더 중요했다는 생각입니다. 개혁적 분위기가 갖는 전 사회적인 문화적 우위, 뭐 이런 것이 중요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