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시대와 인물] 제헌국회 소장파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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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시대와 인물] 제헌국회 소장파의 기수
  • 편집국
  • 승인 2003.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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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환과 국회프락치 사건


지난 16대 대선에서 막판 행정수도 이전이 큰 논쟁점이 되자, "이 기회에 국회를 아예 영종도로 보내버리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지금의 국회는 국민의 신망을 전혀 얻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제헌 국회는 조금 달랐다. 제헌국회 내에서 진보적 입장을 취했던 소장파들이 우리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장파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노일환(盧鎰煥)이었다. 노일환은 35세의 젊은 나이에 전북 순창에서 당선되었는데, 일제시기에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면서 한민당과 인연을 맺었다. 지주와 친일파로 구성된 한민당은 호남지주 김성수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당시의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노일환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지향은 한민당과는 매우 달랐다. 노일환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동아일보 정경부장과 조선신문기자협회 조사부장을 지내면서 현실 감각을 키웠는데, 이런 경험은 해방 후 남한 사회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만 하는지를 정책으로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노일환은 제일 먼저 친일파 척결을 위해 반민특위법과 농지개혁법 제정에 앞장섰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일제 잔재 청산과 경제개혁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은 친일파·지주 정당인 한민당의 정책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또 노일환은 소련군이 철수한 마당에 주한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남북한 평화통일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한편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여순사건이 터지자 노일환은 정부가 탄압정책을 노골적으로 펴나가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경찰독재로 억누르는 가장 악독한 파쇼의 길을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바라는 민주주의 정부만이 유엔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이승만정권은 단독정부라는 핸디캡을 유엔승인으로 보충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순사건 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노일환은 이것이 정적을 탄압하는 데 이용할 수 있고 일제 때의 치안유지법과 다른 것이 없다며 반대했다. 이후 50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 위에 있는 무소불위의 법으로 기능했는데, 노일환은 마치 앞을 내다본 것처럼 이 법이 악용될 것임을 예견했고, 실제로 그것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되었다.

국회프락치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사찰기관은 소장파가 북로당의 지원과 명령을 받고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했다고 발표했지만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에서 검찰은 분명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결정적인 증인이라는 정재한이라는 여인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의원들 모두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노일환 등이 주장한 친일파 척결이 이승만과 한민당의 기반을 완전히 뿌리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된 것이 국회프락치 사건이 터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렇게 짧았지만 왕성했던 노일환의 활동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실 노일환 등의 무소속 소장파는 원내에서 단일한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구성원간의 이념적 동질성도 높은 것은 아니었다. 소장파가 가지고 있던 이념적 지향은 온건 합리적인 '중도파'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장파세력조차 색깔논쟁에 휘말려 와해된 것은 이승만정권이 온건 합리적인 소장파조차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백하게 드러낸 것이었고, 그 결과는 의회정치의 사망이자 행정 권력의 독주였다.

김득중(역사학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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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상 2013-09-28 16:23:02
왜 정부에서는 아직도 자진월북한 빨갱이 로 인식할까요

노주상 2013-09-28 16:22:39
왜 정부에서는 아직도 자진월북한 빨갱이 로 인식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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