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 달리자] ‘간절함’이 만든 첫 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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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 달리자] ‘간절함’이 만든 첫 틀니
  • 김기현
  • 승인 2009.01.12 12:2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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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수필 대장정] 23_김기현(전남 97졸, 광전지부 공동대표)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새내기 치과의사로서 막 임상을 시작했던 것이 벌써 10여년을 훌쩍 넘어섰다. 두번의 유급을 거친 꽉 찬 8년의 대학생활은, 지금 생각해보면 황금의 시기와 같은 것이었지만, 졸업을 앞둔 당시에는 조금 지겨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후에는, 일직선으로만 거침없이 달렸던 나의 삶을 한발짝이라도 뒤로 물러서 관조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자는 욕심이나 바램은 있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이 그것을 가능케 할지는 자신하지 못했다.

그런 나의 바램, 욕심 때문이었을까? 나의 첫해 공보의 근무지로 발령받은 곳은 14개의 섬으로만 이루어진 전남 신안군의 조그만 섬, 장산도라는 곳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인 하의도와 바둑천재 이세돌의 고향인 비금도 사이에 있는 인구 1200명 정도의 작은 섬이다.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200톤급 철선을 타고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던 이 섬은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을 머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은 나의 바램과는 달리, 게으름과 무료함을 더해주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이런 게으름도 필요한 것이라며 자위하며 지내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부스스한 몰골로 진료실에 앉아 있는데, 무척이나 여윈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진료를 받으러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70대였던 할머니의 주소는 틀니제작이었다. 잔존치는 거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마저도 발치후 상하악 모두 완전틀니 제작이 필요한 케이스였다.

환자의 구강상태 및 그에 따른 치료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치료비에 대한 설명까지 마무리하자, 환자가 부탁이 있다며 조용히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흔히 있는 ‘치료비 깍아달라는 이야기이겠지’ 생각하고, 통상적으로 대응할려고 하는 나에게 할머니께서는 “최대한 예쁘게 만들어 줘야 해”라고 하신다. “예?”라고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꼭 이쁘게 만들어줘야 해, 한 10년은 젊어보이게......” “아, 예......그래야지요.”라고 대답해버렸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의 첫 완전틀니는 ‘예쁘고, 10년은 젊어 보이게’ 제작해야만 했다. 모든 진료의 첫 케이스는 능력과는 무관하게 열정과 의지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책도 찾아보고, 선배들에게 전화도 해서 나름 탄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예비인상 날짜를 기다렸다.

예비 인상체득을 위해 내원한 할머니께서는 다른 말은 하지도 않으신 채, 다시한번 ‘예쁘게, 10년 젊게’를 강조하신다.

이쯤되니 슬슬 걱정이 앞선다. 심미적 요구가 높은 사람은 꼭 뒷탈이 많다는 이야기를 워낙에 많이 들었던 터라 이날은 선뜻 “예”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대신 할머니의 심미적 요구를 낮추기 위해 다른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머니, 예쁜 것은 사람마다 기준이나 보는 눈이 다 틀려서 완벽히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예요. 그리고 틀니는 인공적인 한계가 있어서 더욱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나는 예쁘게 만들어 줘야 해, 이빨도 안할려다가 50년만에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예? 50년만에요? 그게 누군데요?”

“응, 북에 있는 언니, 동생들이야.”

“북에요? 근데 어떻게 만나실 수 있는데요?”

“정부에서 이산가족 만남을 추진한대잖아. 신청하라고 하길래, 신청하고 기다리는 중이야.”

“저도 그 뉴스는 봐서 아는데요, 신청한다고 다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남 자체도 될지 확실치 않은데요?”

“이번에 될 것 같아. 아니 되야 해, 안되면 안되는데......”

“.............”

“만나는데 이꼴로 가면 안되니까, 꼭 예쁘게 만들어줘야 해, 10년은 젊어보이게”

“예”

또 다시 약속을 해버렸다. 예쁘고 10년은 젊어 보이는 틀니 제작을.

이후 할머니의 인생사에 대해 치료를 할 때마다 조금씩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담고 있는 할머니의 인생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황해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서울로 왔다가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이곳 한적한 섬에 정착해 거의 50년을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나 만날 생각은 엄두에 두지 못하다가, 이번에 이산가족 만남 신청을 처음하게 된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꼭 이번에는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셨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그런 사업들은 선거전략상 말 그대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설사 실행에 옮겨지더라도 할머니의 경우 순위가 많이 밀려 당장은 힘들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직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가난한 촌로의 지갑을 열게 하였고, 씹는 용도가 아닌 예뻐 보이는 용도의, 심하게 말하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단 하루용 예쁜 틀니제작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어찌됐든 나의 첫 완전틀니 제작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으며, 할머니도 만족해 하셨다.

물론 잘 만드고, 예쁜 틀니 때문이 아니라 치료과정에서 쌓인 친밀감과 적지 않은 치료비 DC 효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후, 그때 신청했던 이산가족 상봉은 추진되지 못했다. 때문에 할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당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가 가족들을 꼭 만났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은 그후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수차례 걸쳐 성사되었던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할머니의 사무친 ‘간절함’이 온전히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의 ‘간절함’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 같은 확신을 내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점철된 1년간의 섬 생활을 마치고 뭍으로 나와 건치에 몸담고 생활하면서 가끔 그 ‘간절함’이 생각이 나곤 한다.

이론과 실천으로 이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갈구하는 무엇인가를 위한 ‘간절함’이 우리에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말이다.

그래서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간절함’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그런 것이 있기는 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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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총각 2009-01-16 16:10:54
글 잘 읽었습니다.

강민홍 기자 2009-01-16 16:02:45
'간절함'! 저도 그걸 잊고 살았던 것 같은데..

2009-01-15 11:14:15
글도 잘쓰시는구나.^^

sogood 2009-01-14 12:22:48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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