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베트남에 가는가?
상태바
나는 왜 베트남에 가는가?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9.03.07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트남 역사기행]1-베트남의 눈물

 

▲ 미군의 폭격으로 남부 인민이 고통받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호찌민
2008년 9월 1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 역사 기행을 하였다. 한국 사람은 물론 베트남 사람도 가보기 힘든 곳을 다녀왔다. 그렇기에 이 답사에는 베트남 역사에 깊이가 있고 친절한 안내자가 필요했다.

‘베트남을 이해하는 젊은 작가 모임’의 대표를 역임한 중앙대 방현석 교수에게 문의 했더니 대번 ‘비엣’ 선생을 추천해주셨다. 호찌민 시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구수정 박사에게 비엣 선생과 답사한다고 하니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신다.

나는 그런 비엣 선생과 함께 베트남에서 열흘을 보냈다. 비엣 선생은 베트남 전쟁이 때인 1965년 유학생에 선발되어 당시 꽤 발전한 북한 대학에서 전기화학 공부하셨고 대학 졸업 후에도 북한에서 오래 거주하셨던 분이셨다. 그러니 우리말을 잘하시는 것은 당연했다.

 

비엣 선생은 답사 설명 할 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자주 보였다. 호찌민 시신을 안치한 바딘 광장의 영묘를 빠져나오다가 방현석 선생과 눈길을 마주친 비엣 선생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고 방현석 선생 책에 쓰여 있다. 하노이에 사시면서 호찌민 영묘를 한 두 번 간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호찌민 생가를 답사할 때, 호찌민 주석이 형님이 돌아가셔도 나라 일이 바빠 형님에게 직접 조문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은 편지를 주민에게 보냈다는 현장 가이드의 설명을 통역할 때도 눈물을 보였다.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을 텐데.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북베트남은 15세부터 45세까지 남자를 징집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안전한 유학생으로 선택된 학생들은 극소수 엘리트였다. 그 나이 또래 거의 대부분 청소년들은 전장으로 갔고 전장으로 간 거의 대부분은 전장에서 산화하였다.

“우리는 유학가기 전 1달간 정치 학습을 받았습니다. 그 때 많은 동료들이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전장으로 가는데 우리만 어떻게….” 비엣 선생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1965년 8월 화차와 다름없는 기차를 타고 4박5일간 중국 대륙을 거쳐 북한에 도착했습니다. 한 벌 밖에 없는 옷이 아주 더러워졌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자 바로 옷을 세탁했죠. 속옷만 입고 침대에 벌벌 떨고 있는데 환영행사 한다고 식당으로 내려오라는 거예요. 벌거벗고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옷이 없어 못 간다 할 수도 없으니 전부들 배가 아파 못 간다 했죠.” 비엣 선생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2008년 6월 5일 영남대학교에 초청 강연 하러 온 팜 티엔 반 베트남 대사를 만찬 자리에서 만났다. 내가 낄 자리도 아닌데 주최자인 영남대학 정치학과 김태일 교수가 적극 주선한 덕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팜 대사에게 면담을 요청하니 6월 16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대사관을 찾아오라고 흔쾌히 승낙하셨다.

후배 박장근, 대구베트남우정회 총무 전채남 박사와 함께 대사관을 찾으니 대사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우리를 맞아 주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대학로 베트남식당에 가 푸짐한 저녁 식사 대접까지 해주셨다.

팜 티엔 반 대사 역시 호찌민 장학생으로 비엣 선생처럼 북한 유학생이었다. 1948년생이니 비엣 선생보다 2살 아래고 북한에 간 것도 비엣 선생보다 2년 뒤인 1967년 이었다. 팜 대사는 김일성대학에서 조선고전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래서인지 팜 대사는 비엣 선생보다 우리말에 더 능숙했고 어휘 선택 능력은 웬만한 한국사람 보다 훨씬 더 뛰어난 그야말로 전문가였다. 당시 김일성대학 총장이 황장엽이었다고 한다.

팜 대사는 자신의 역정을 찬찬히 이야기 했다.

“1964년 미국과 전쟁 발발 시 하이퐁에 있는 10년제 고등학교 8학년생이었다. 전쟁이 나자 폭격이 심한 하이퐁에서 40km 떨어진 시골학교로 옮겨 3년 동안 다녔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부모님은 하이퐁에 남았다.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도시에서 온 학생들과 시골 학생들은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쯤 대학에 진학하는 소수의 학생과 유학하는 극소수의 학생, 대부분이 군에 가는 학생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서로 차별없이 지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다 이지적이고 풍채가 당당한 대사께서 갑자기 눈물을 펑 쏟았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난 뒤 말을 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전장에서 죽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저명한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수용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수용소의 사람)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란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 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 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 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언제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네이팜탄과 하늘을 뒤엎은 고엽제로 망가진 베트남의 전국토가 다름 아닌 아비규환의 아우슈비츠였다. 미군의 폭격기에 당한 3,200여일, 한사람으로 치면 265kg의 폭탄 선물을 미국에게서 받았다. 비엣 선생이나 팜 대사처럼 베트남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특별한 이름이 필요하다.

 비극 중의 비극인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보이는 눈물하고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강대국을 상대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기 위해 흘린 약소국의 눈물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1946년 프랑스가 전쟁을 시작하자, 프랑스 기자가 호찌민에게 물었다.

‘근대식 무기도 없이 프랑스와 싸우는 것은 무모하지 않는가?’

호찌민의 답은 간결했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

이런 호찌민도 국회에서 미국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피폐해진 남베트남 참상을 보고 받을 때마다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어떤 무기보다 강했던 정신이 흘리는 눈물, 승자의 슬픔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후손들의 행복을 바라며 흘린 눈물, 이 눈물이 가진 의미를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찾을 때까지 나는 가고 갔던 베트남에 또 갈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