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들이 존경받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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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들이 존경받는 세상
  • 편집국
  • 승인 2002.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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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1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총리서리에 지명되었던 장상씨는 결국 낙마의 고배를 마셨다. 많은 구설수와 함께 논란도 있었지만, 그 중 언론에서는 그다지 다루지 않았으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상씨의 김활란 전 이대 총장에 대한 시각이다.

장상씨는 이대 총장을 하던 1998년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활란 상’을 제정한 사람이다. 그리고 ‘김활란 상’ 제정을 설명하면서 김활란을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세 여성사, 더 확대해 조선시대 500년까지 합쳐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이 낳은 아마도 거의 유일한 세계 여성지도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장상씨의 이러한 생각을 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장상씨도 인정했듯이 김활란이 일제 말기에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이화여전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 장상씨 역시 그런 견해를 밝히고 있다. 1940년대가 되면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어쩔 수 없이 친일행각을 했고, 그것은 민족의 고통을 자신들이 짊어진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김활란은 1941년 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그것까지는 강압에 못 이겨서 그랬다고 치자. 그 뒤 부인궐기 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시책을 선전하였을 뿐 아니라, 징병이나 징용 혹은 학병에 가족들이 동원되는 것을 이해하고 적극 지지, 지원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 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글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 징병제가 결정된 뒤에 김활란이 ‘신세대’에 쓴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라는 글이다. 1942년부터 실시된 징병제는 우리 조선인들을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정을 저렇듯 감격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글이 과연 강압에 못이겨서 쓴 사람의 글이란 말인가? 더욱이 문제는 김활란은 강압에 못이겨서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번하게 이런 발언을 하고, 글을 썼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의 조카가 이모에게 이제 좀 자중하라는 충고를 했을까?

다음으로 우리는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과연 친일 행각을 벌인 사람들만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주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항일독립군이 있었음은 물론이요, 국내에서도 지하 활동을 벌이던 많은 항일투사들이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국내에서도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고 고난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찌 친일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과연 김활란이 1940년대 들어서 친일 행각을 시작했는지 하는 점이다. 김활란은 이화여전 교장을 맡았던 1939년이 아니라, 부교장을 맡았던 1936년부터 친일행각을 위한 여러 모임 및 행사에 참여하였고, 애국금차회라는 조직에서도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우리가 김활란 같은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다른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김활란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각 때문에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살이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기는 했으나 단 한 명도 처단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와 친일파들의 방해 특히 친일 경찰들의 습격 등으로 사실상 와해되고, 겨우 14명만 구속했으나 그나마 구속된 자들은 1년도 못 되어 6·25 전쟁과 함께 석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들 중 2,071명을 사형에 처하고, 3만 9,900건을 징역형으로 다스렸으며, 벨기에는 5만 5,000건, 네덜란드는 5만 건 이상을 징역형으로 다스렸다. 정말 너무 대조적이지 않은가?

김활란은 해방 뒤에 아무런 제약 없이 화려한 일생을 살다 갔으며, 진실로 뉘우치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상씨의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이후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우리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해랑(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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