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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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 강재선
  • 승인 2002.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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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 가득 찬 엔진 소리 속에서 라디오가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에 멋을 한껏 부려 마구 꺾어대는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수수하고 맑다. 안치환이 부르던 ‘내가 만일’ 하고는 또 다른 맛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진실되어 보여서,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조금은 미숙한 끝음 속에 미세한 떨림이 있다. 그 떨림이 맘에 닿는다.
고백하자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들의 사랑에 흠뻑 빠져 판타지에 동화되어야 된다고 되뇌이면서도 이창동 감독의 차가운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힘겹다. 감독은 약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를 호되게 야단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주변인들을 힐난하는 것도 아니다.

좀 모자란 전과자와 장애인이 광장으로 나갔을 때 그들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뿐이다. 그 카메라 앵글 속에, 종두의 형수나 공주의 올케 자리 쯤에 내가 서 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발뺌하면서도, “너 변태지?” 라고 서슴없이 묻는 경찰처럼 ‘일반인’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내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에 온전히 동화되기가 미안하다. 자장면을 손으로 말아서 입에 넣어 주고, 한밤중에 가로수의 가지를 잘라내고 라디오를 크게 틀고,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에 미쳐서 민폐를 끼치고 닭살 돋는 통화를 하고, 그들의 삶과 사랑에도 너무나 당연스러운 위트와 유머가 있는데 어줍잖게 경직된 윤리관이 함께 울고 웃기를 망설인다.

해피 엔딩의 냄새를 풍기지만, 종두와 공주가 세상과의 소통에는 실패한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경쟁력 없는 그들의 오아시스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는 그들의 사랑이, 바보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아름다운 오아시스를 위해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등이다.

때로는 내게도 오아시스 같은 만남이 있었거나, 갈구했었다. 아닌데도 오아시스라고 우겼던 적도 있고, 오아시스임에도 알아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알아보지 못했다기보다는 내가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너무 많았고 내가 가는 길 어디쯤 다시 나타나리라 굳게 믿었었나 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가치를 두고 살 것이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 하다. 오아시스라는 게 내 인생의 몫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있기나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대 뺨에 물든 거 다 지우고, 그대 위해 노래했던 거 다 취소하고, 오아시스를 신기루로 떠나 보냈지만, 오늘도 나는 오아시스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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