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창 - 남한여성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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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창 - 남한여성 실종사건
  • 신순희
  • 승인 2004.11.17 0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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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쿼터와 시네마 천국

전세계에서 프랑스랑 우리나라뿐이란다. 헐리우드에 대항해 자국 영화산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은 나라는 딱 둘뿐... 정말일까 싶지만, 전문가가 정말 그렇단다. (물론 현재 스코어일뿐이지만)

한국 영화, 정말 잘 나간다

그것을 가능케한 힘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분석만 있을뿐.

대부분의 영화전문가들은 주된 이유를 스크린쿼터라고 말한다. 스크린 쿼터에 대해서야 이미 아는 바대로 극장마다 한국 영화 상영일수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고, 또 미국이(헐리우드가) 없애지 못해 안달난 것만 봐도 그 효과가 반증되는 제도이다.

하나 더 들라면 정부의 지원. 여성 영화제 같은 쬐끄만 비주류 영화제에도, 신인 감독의 저예산 독립 영화에도, 영화진흥공사의 후원이나 각종 정부 지원금이 꼭 따라다닌다. 외국 관계자들이 놀라고 신기해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비대한 정부라는 느낌도 들지만, 대부분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진 각종 영화지원 정책과 기금은 오늘날 한국 영화의 눈부신 성공 뒤에 숨은 조력자라 할만하다.

반면 몇몇 인본주의자들은 그 이유를 한국 영화감독과 한국 관객의 열정에서 찾는다. 남기남감독류의 비디오용 애로물과 결별하고 80년대 후반부터 '코리안 뉴웨이브'물결을 일으킨 박광수,장선우 감독 이후 일명 386 학출감독들의 영화가 이전의 한국영화 필패 신화를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1000만 영화가 연달아 두편이나 가능할 정도로 한국 국민의 영화 사랑이 대단히 깊다는 설명이다.

분석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다른 분석과 다른 시각은 서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데, 한국 영화의 봄날이 스크린쿼터 등 제도 때문이라면, 스크린 쿼터가 무너지는 날 봄날도 끝장날 것이고, 그 봄날이 대단한 감독들과 더 대단한 국민들때문이라면 그깟 제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리라. 오히려 스크린쿼터를 포기하는 대신 대미무역을 늘려 경제를 살리면, 그만큼 넉넉해진 국민들이 더욱 더 영화를 사랑해 줄런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서로 다른 분석과 대안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다. 스크린쿼터를 반대하느라 삭발까지 한 감독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후하게 평가하는 분석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스크린쿼터 찬반 양측 모두 최근 한국 영화가 잘 나간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는듯 하다.

여기서 잠깐! 잘 나갔다던 한국 영화 톱 5를 한번 꼽아보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순이다.(역대 관객순)
제목만 들어도 뭔가 공통점이 확 느껴지면서 좀 수상하지 않은가? 

위 영화들 모두 군대(혹은 군대 버금가는 조직인 조폭)를 배경으로 국가나 전쟁(혹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문화가 화면 가득 펼쳐진다. 주인공은 물론 주요 조연도 모두 남자들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이은주는 두 형제의 고조된 갈등이 폭발하는 장치이자 고향을 지키는 어머니적 존재일뿐이며, '실미도'에는 강간당하는 민간인 여성 외에는 아예 등장인물 중 여성이 없다. '친구'에서는 친구들이 사이 좋게 나눠 가지는(사귀는) 공공재로 여성이 한명 나오고, 그나마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영애는 스위스 여성이고, '쉬리'의 이방희는 북한 여성이다. 가히 평론가들이 남한 여성의 실종이라 부를만한 현상이다.

사실 수많은 영화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왔지만, 국민의 1/4이 열광한 영화가 이런 공통점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참 씁쓸하다.

나는 단순히 특정 영화속 남한 여성의 실종만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헐리우드에 대항해 잘 나가는 자랑스러운 한국 영화의 실체가, 사실은 국가주의(nationalism, 이는 가부장문화의 또다른 전형이라 할 수있다)를 소재로 한 몇몇 영화에 국민의 1/4이 함께 열광한 결과일뿐이라면 이건 축복이 아니라 악몽이 아니겠냐고, 세계에 딱 두나라뿐인 문화적 자부심이 아니라 프랑스의 경우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전체주의적 문화의 잔재가 아니겠냐고, 특정 영화의 편중일지라도 한국영화라는 이유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한국)재벌위주의 경제 논리와 너무 닮아있지 않냐고, 뭐 그런 의문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영화가 잘 나가고 있기는 한 거냐고, 한국 영화의 적은 단순히 헐리우드뿐이냐고, 스크린쿼터라는 자국영화보호정책만 지키면 되는 거냐고, 그러면 프랑스랑 어깨를 나란히 견줄만한 문화국가가 되는 거냐고, 또 나는 자꾸만 묻고 싶다.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답안들이 제시되곤 했는데, 우선 '다 그런건 아니다'론이 먼저 나오고, 아랫목이 먼저 뜨듯해져야 윗목도 뜨듯해지니 기다리라는 '아랫목 우선론'과 해일이 일고 있는데 한가하게 바닷가에서 조개나 줍고 있다는 '해일과 조개론' 등이 있다.

일단 쉬리나 실미도가 나와서 천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산업이 자리를 잡은 후에야 영화속에서 여성이고 뭐고를 따져볼 수 있으니, 기다리라는 논리와 거대한 미국 자본이 한국 영화산업을 통째로 삼키려는 이 중대한 시기에 한가한 타령을 한다는 논리이다.

'다 그런건 아니다'론에는 나도 동의하므로 우선 빼놓고

도대체 누가 아랫목이고 누가 윗목인지, 365일 부는 바람을 해일이라고 호들갑 떠는건 아닌지, 그 용어를 정의해버리는 권력의 횡포를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일단은 눈높이 답변에 매진해본다.

윗목이 뜨듯해야 방이 진짜로 뜨뜻한 거라고, 조개를 줏을 수 있을 때에만 바다는 비로소 내게 의미있는 공간이라고, 365일 추운방과 일년 내내 해일이 이는 바다는 가짜라고 말이다.

우간다랑 우리나라 딱 둘뿐보다는 프랑스랑 우리나라 딱 둘뿐이 참 듣기 좋다. (우간다 미안~) 다른 건 몰라도 문화영역에서 프랑스의 상대적 수준은 가히 세계최고가 아닌가.

일시적이나마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양적 비교나 수치상 점유율의 자부심에 풍덩 빠져있기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 잘 나가는 한국 영화 더 잘나갈 바라고, 스크린쿼터 꼭 지켜내길 바라지만, 그것이 단순히 특정 영화 자본의 독점적 시장 점유율을 지켜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해일 속에서도 조개를 줍는 심정으로 외적, 내적 투쟁을 함께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영화는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기도 한다. 남한 여성들을 실종시켜 우리 사회의 반동을 비추고 있는 한국 영화에 시네마 천국을 향한 또 다른 코리안 뉴웨이브를 기대해보는 건 너무 낙관적이고 수동적인 희망일까?

진짜 천국은 윗목과 아랫목이 모두 뜨뜻한 곳일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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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4-11-20 10:54:46
93년 그렇게 척박한 상황에서 200만 돌파의 멋진 영화(난 서편제가 멋진 영화라 생각하지 않지만)가 나왔는데... 어째서 기반이 훨씬 나아졌다는 지금. 취화선이나 박하사탕이 아니라 실미도나 태극기나 친구만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할까.
요게 문제 아닌가 싶다. 흥행에서 말이다. 영화자체로야 박찬욱, 김기덕같은 이들이 있으니 예전과 비교도 안되지만...

허리우드의 영화가 한국에서는 힘을 못쓴다고들 하지만, 사실 지금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흥행하는 영화들이랑 허리우드 영화랑 다른게 뭔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슈워제네거가 아니라 설경구가 나왔다고 해서, 폭스가 아니라 씨제이가 배급했다고 그게 허리우드와 다른 진정 우리색깔의 영화라 할수 있을지...

물론 서편제처럼 그런영화만으로도 '대학민국 만세다'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릴때'를 만들었다고 '허리우드의 양심과 지적인 영화만세다'라고 하면 좀 이상할것 같은데...
"단순 관객 수로 최근 허리우드 영화를 평가하고 그런 영화들 속에서 페미니즘과 정치적 입장을 논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아닐까."라고 미국놈이 그러면 참 구리구리한 이야기 일것같다.

최근에 정말 눈부시게 좋은 한국영화들이 많지만 정작 영화산업의 주류를 점해가는 것은 허리우드의 흥행공식을 빼다박은 영화들뿐이라는 것...

제작사가 감독을 먹어치우고, 배급사가 다시 제작사를 먹어치우고 독점체제를 구축한 허리우드의 영화산업모델을 가장 정확히 따라가고 있는 최근의 영화산업개편현실...

미국모델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기 모델을 만들어간 단단한 프랑스 영화산업(아직도 얘네들은 영화를 산업으로 보지 않는 놈들이 많다.-말이아닌 진정으로다가-)
과 비교해서 한국영화는 어디에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냥 무슨무슨 영화만으로도 '한국영화는 만세다'는 솔직히 거시기 하다.
그런영화 한두편 없는 나라가 세상에 어딨나? 일본영화, 이란영화는 만만세급이다.
(그렇지만 올드보이는 만세부르기에 당당하게 출품할 자격있음에 동의한다.)

그리고 기사는 기냥 좀 색다르게 분석한게 잼있다. 그러고 보니 남한여성이 다 실종되어 있었네... 근데 난 필자의 "다 그런것은 아니다" 론이 맞는것 같다.

나는.. 2004-11-19 17:11:21
올드 보이' 한 편만으로도 만세를 부르고 싶다. 이 영화의 주된 코드가 '복수'지만, 복수의 그림자 밑에는 바로 '여성문제'가 깔려있거든.. '올드 보이' 이 영화 속에는 포스트모던 미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감시자와 감시 당하는 자 사이의 '파놉티콘', 권력을 가진자와 박탈자 사이의 소위 푸코식 '권력게임'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관계의 역할의'전복', 그리고 이 영화의 특징인 '탈이데올로기',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국적 불명의 '탈국가'(탈국가주의가 아님), 영화의 주 무대는 바로 변방의 당혹사, 그리하여 '탈중심성 또는 주변부성'. 거기에다 판타지에 가까운 폭력의 미학, '무정부성', 무엇보다도 전통적 부녀관계, 가족의 의미를 해체시켜 버리는 '해체성'(한달 전쯤 해체주의의 전도사 데디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파편화한 한 개인의 복수,복수,복수,...이 모든 장치들 이야말로 포스트모던 미학의 결정판 아닌가...이 영화의 코드는 한 마디로, 푸코식으로 말하면 복수를 향한 '권력추구'라해도 과언이 아닐터이다. 이런 지극히 포스트 모던한 초현대식 영화장치들이 정작 프랑스에서 잘 먹히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유인 즉슨 프랑스에서는 포스트모던 이란 용어 자체를 잘 쓰지 않는다는 어느 프랑스 철학 전공자의 현지 리포트, 홍세화씨 말마따나 정작 포스트모던 가치 보다는 모던적 가치인 합리주의와 관용, 연대 등 근대적 가치가 사회적 행동양식의 근간이 되는 곳이 프랑스란다. 그런 나름대로 계몽정신이 살아 있다는 프랑스 파리장들은 '올드 보이'가 엮겨웠을지도 모른다...근데 놀랍게도 칸 영화제에서 유독 프랑스인들에게만은 주목 받지 못한 이 영화가 요즘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관객들의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고도 하며, 프랑스인들 조차 미래의 영화를 알려면 이 영화를 보라는 말도 들린단다. 어느정도 사실에 입각한 소문인지 모르지만, 매우 포스트모던해 보이는 계몽주의자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현실 정치, 도덕, 경제, 사회 이외의 문화의 문제, 특히 미학적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지극히 포스트모던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 권력에의 의지로 표상되는 니체주의는 푸코의 파놉티콘으로 시작하여 '올드 보이'라는 미학적 관점으로 수렴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프랑스인들은 [올드 보이]적 현실은 받아드릴 수 없지만 [올드 보아]적 가상현실, 미학, 영화는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무정부주의나 '오로지 권력'과 같은 니체주의, 푸코주의적 현실 분석은 분석과 해석 차원으로만 끝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런 분석이 현실의 문제에 개입했을 때(여성문제도 마찬가지다), 모든 현실 문제의 해결은 푸코의 말대로 수 많은 차원의 끝없고 영구적인 권력투쟁으로 산개되어 버리고, 당대의 주된 현실적 모순엔 눈감아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실세상은 여전히 근대적이며 오히려 전근대적 관행이 역류하고 있지 않은가..대표적으로 전쟁, 기아, 질병, 가난 등. 그래서 난 '올드 보이' 한 편 만으로도 만세를 부르고 싶다.

송필경 2004-11-18 17:40:26
나의 초기 개업시절만 해도 가끔 한나절 씩 정전이 되곤 했다. 정전은 평일에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휴가였다. 어느 날 출근하자 오전은 정전이라 했다. 신난다 하며 뛰어간 곳이 극장이었다. 평소 음악에 조금 관심을 가졌기에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를 골랐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었소.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소.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소. 신은 자신의 도구로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선택하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밖엔 안주셨어, 그건 부당해." 이처럼 보통사람의 대변자로 생각한 평범한 음악가 살리에르는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를 저주하고 증오해서 파멸시키는 이야기였다.
더할나위 없는 모차르트의 배경음악에 웅장한 무대 무엇보다 치밀한 심리묘사에 매료되어 나는 지금도 아마데우스를 최고의 영화로 친다. 하지만 씁쓸했던 기분도 있었으니 '우리는 언제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접하고서는 '아마데우스'에 대한 콤플렉스가 씻은 듯 사라졌고 "박하사탕" 탄생에서 이창동 감독이 일본의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견주어 하나도 손색이 없다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사실 한 도시에 한 개의 개봉관 밖에 없었던 93년도에 2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서편제'가 수 십 개의 개봉관이 있는 지금 상영된다면 얼마나 많은 관객을 모을 것이냐를 생각해 본다. 역사에는 가정은 씰데없는 것이지만, 아마 '태극기 휘날리며'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라는 추측은 억지일까. '아마데우스'와 다른 의미에서 내가 본 최고의 걸작은 '박하사탕'이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영화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관객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에게서는 극찬을 받을지는 몰라도...

그러므로 단순 관객 수로 최근 한국 영화를 평가하고 그런 영화들 속에서 페미니즘과 정치적 입장을 논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아닐까. 또한 동원 관객 수 베스트5 안에 드는 영화 중에 친구를 제외하고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까지 금기시 되어온 남북관계를 배경에 깐 영화들이었다. 아마 군사정권 시절에는 꿈조차 꾸지 못할 영화들이었다. 나는 이들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 남북이 대결하는 이 시대에 던진 영향은 어떻게든 평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서편제'와 '박하사탕' 두 편의 영화만으로도 한국 영화 만세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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