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만 보다 역사와 살았다 말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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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만 보다 역사와 살았다 말할 수 있나"
  • 편집국
  • 승인 2010.01.20 17:0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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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25년간 한자리 지키는 영원한 청년의사 이재균 원장(이재균치과)

이 글은 건치 광주전남지부(회장 김기현) 2009년 소식지에 게제된 글의 전문이다.

“1985년 개원해 25년간 줄곧 한 자리에만 있었어요. 그때는 광주에 많아야 60여 곳이나 됐을까….”

어느새 희끗희끗한 머리숱이 정겹게 내려앉았다. 영원한 청년의사 이재균(61, 이재균치과 원장) 회원. 처음엔 신문기자에 뜻을 뒀단다. 정치외교학과에 문을 두드려보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야 치의학에 다시 눈을 돌리다보니, 개원도 조금 늦은 편이었다.

▲ 이재균 원장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녔어요. 외국신부들이 많을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구호물자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때였죠. 가치관이 형성되기까지 교회가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여기서 그의 어머니 최순덕(99) 여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최 여사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촉매제가 된 ‘백지동맹’ 사건의 산 주역. 당시 전남여고보(전남여고의 전신) 3학년 회장이던 최 여사는 일제가 조선 학생들이 봉기한 11월 3일 직후 조선 학생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에 나서자 시험거부 투쟁으로 맞섰다.

전날 밤을 새서 삐라를 준비한 최 여사는 시험 당일 각 학년 교실을 직접 돌았다. 그리고  아예 시험지에 이름 한 자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손에 연필도 쥐지 말 것을 호소했다. 학교당국의 회유와 압력에도 결국 전교생은 구속된 조선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끝까지 아예 손에 연필마저 쥐지 않았다.

광주의 여학생들이 중간고사를 거부한데 이어, 1주일여 간 운동장에서 완강히 연좌 노상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은 숨죽여 신음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광주에서 타오른 불길은 곧 일파만파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국내는 물론 간도 등 해외로까지 확산된 반일운동은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최 여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전남여고보 최초로 강제 정학과 퇴학처분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대서소를 운영했는데, 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찍 작고하시고 말았지요. 어머니가 행상하시면서 7남 1녀 동생들까지 어떻게 다 대학을 보내셨어요. 형제들이나 저나 그 덕분에 먹고는 살지만.”

어려서부터의 영향 때문인지 식구들 역시 가톨릭이다. 세례명 ‘가스발’은 아일랜드 신부로부터 받았다.

“하느님을 구원의 주체로만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부터 깨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하느님이 구원의 주체에요. 인간 자신이지. 내가 바로 살 때만이 구원 될 수 있는 거죠.”

신앙과 사회, 종교와 현실, 영적인 것과 속적인 것이 이원화 될 수 없다는 그의 종교관은 자연스럽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주도한 장영주 신부와는 ‘언제 술 한 잔 안 사느냐’고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 그는 또 1989년 창간한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이자, ‘말’지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 열혈 구독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해 8월 15일 신부님들과 함께 무박 2일로 개성관광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다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초코파이 하나도 안 먹어 봤을 것 같은 어린애들인데, 손 흔드는 그 모습이 내내 아른거리는 통에….”

‘음식쓰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산더미같이 버리면서, 배고픈 북녘 형제들을 위해 조건 없이 도와주면 안 되느냐’는 대목에선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그는 현재 (사)광주청소년서포터즈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주위에서 건치를 좌파모임처럼 얘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민족과 정의, 인권과 자유, 나눔의 삶을 더불어 살아 온 사람들이에요. 진정한 인술로 의술을 펼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때로 아들 또래의 후배들과 같이 어울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 그러나 기우였다.

“우리 때와는 또 달라요. 요즘 젊은이들은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아요. 후배들로부터 최근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나이, 그런 건 관계없어요. 회갑이란 말도 아예 빼주세요.”

한때 은퇴 후 아버지 고향인 무안 해제 근처에 아담한 병원을 내 지역민들을 위해 봉사할 생각도 가졌었다. 그러나 최근 생각을 바꿨다.

“왜 그때가서야 봉사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부터 해야지. 손 떨림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점심 때면 주로 근처 헬스장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시간을 보낸다. 골프채를 잡아 봤지만 ‘맨 돈만 푸고 말았다’고. 친구들도 그런 줄 알고 점심 때면 안 부를 정도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과의사는 상류층에 속하죠. 그럴수록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가난의 의미를 아는 의사가 됐으면 해요. 먼 산만 쳐다보고 있고서야 나중에 역사의 한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후배들에 대한 영원한 청년 의사의 바람이자, 곧 자신을 곧추세우는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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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2010-01-21 16:34:17
영감이 끊기고/ 전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젊은이보다 더 젊은 청춘을 간직하고 계신 분....

공형찬 2010-01-21 12:29:01
광전 건치의 대부로 든든한 뒤바침을 해주시는 선배님을 존경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 언제나 청년의 마음 선배님처럼 따라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30대에는 40대까지 운동하는 선배가 존경스럽더니 40대가 되니 60넘어서까지 하는 선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언제나 앞서가시는 선배님이 있어 저희들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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