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아름다운 이유] 운곡서원 커다란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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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아름다운 이유] 운곡서원 커다란 은행나무
  • 한명숙
  • 승인 2004.1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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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보고 싶다,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노래를 들었을 때 픽-- 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20대의 한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던 것도 같고, 그렇게 좋아했던 인간이 죽을 만큼 싫어졌던 기억도 있기에 그 노래가 가진 절실함과 현실에서의 가벼움이 교차되기 때문이다.

11월이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는 이즘 나 역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다는 노래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 장소가 있다. 경주 강동면 왕신리 310번지에 있는 운곡서원의 400년 된 은행이 그 큼지막한 옷을 벗는 의식이 너무 보고 싶었다.

서원은 포항 가는 국도변에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계곡을 가르는 두개의 짧은 다리를 건너 실제 그리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스스로 몸을 감춘 듯한 느낌이 들만큼 구불구불한 길 끝에 있다.

그 곳이 안동 권씨의 후손들이 만든 곳이라는 등, 대원군에 의해 사라졌던 사원 이라는 등의 역사적 사실은 늘 그러하지만 나에게는 별 느낌이 없다. 내가 그 서원을 기억하고 찾는 단 하나 이유는 바로 그 크고 잘생긴 은행나무다.

서원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 거인 같은 나무를 보고나면 그 곳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나무를 비껴서지 못했다. 그 곳을 많이 좋아하고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보고 싶어 했던 곳이고, 그곳을 찾아갈 때 동행하는 이는 아주 친한 사람으로 한정을 짓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의 큰 밑둥치를 보고 있노라면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이 그립고 그 손을 맞잡고 오늘 가지고 온 이 인연은 몇 년을 버틸 것인가 나무에게 물어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은행은 점심시간의 짧은 휴식시간을 이용해 20분 정도 차를 달려온 나를 위해 노란눈발을 흩뿌리고 있다. 그 아득한 나무의 꼭대기를 어지럽게 지켜보며 나는 큰 나무가 뿌리는 은행잎이 이불처럼 포근히 땅을 덮는 정경에 한 오점이 되어 고집스럽게 고개 처들고 보고 또 본다.

이곳을 만난지 이제 2년이 다되었지만, 언제 제를 지내고 언제 행사가 있는지 모르고 그 행사를 본적도 없다. 변화가 있었다면 1년 전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작은 초가집을 찻집으로 꾸며 중년의 여인이 차와 도자기를 팔며 이 곳 정경에 눈과 마음이 빼앗긴 이들을 달래주었다는 점이다.

그 집이 불타 시커먼 숱 흔적 서 너 개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난 나무의 안부를 먼저 물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알고 있다.

다시 젊은 시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물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여기까지 오는 일이 피곤해서 싫다고 했던 어느 늙은 여배우 말에 긍정하며 그 여배우처럼 나도 지금의 살아감, 늙어감을 만족하며 살아야지 했는데 저 은행처럼 늙어 더 커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삶이 있을 수 있다면 늙음은 만족이나 자위의 문제가 아니라 축복이 되지 않을까?

나처럼 이 곳에서 생각하고 결론내리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이들의 장시간의 휴식을 생각하고 만든 화장실인지, 노란 은행의 아름다움에 노랗게 놀란 인간들의 소변기를 생각하고 만든 화장실인지, 유난히 멋스러운 화장실이 올해 만들어졌다.

이제 찾아오는 이가 있어도 반길 찻집도 사라지고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 곳에서 인적을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저리 멋진 화장실만 덩그러니 만든 속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목조로 해서 재래식으로 지어진 화장실은 성의 있는 자세로 서 있음은 분명하다.

소설가 김훈이 선암사 화장실에 대하여 ‘사랑하는 그대여! 다음 세상에서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했던 구절을 쓸데없이 기억하고 다니는데, 나에게 은행을 멀찍이서 지키듯이 서 있는 화장실도 제목소리를 내며 상상 속으로 들어와서는

"인간이 사는 것은 먹고 싸는 일이고
싸는 똥은 노란 황금색이 좋다하는데
네 아무리 애써 잘 먹어도 저 은행만큼 잘 싸겠냐?
1년을 잘 살아 한 계절에 황금으로 배설하는 저 은행의 행위를
이쁘다, 아름답다 언어로 뱉어내며 넋놓지 말고
니 밑닦음이나 잘해라"라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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