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국 ‘건강보장 체계 개발’ 관심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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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국 ‘건강보장 체계 개발’ 관심갖자
  • 권순만
  • 승인 2010.02.0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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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정책 10년 회고·10년 전망](13) 건강보장 체계와 국제 개발

이 글은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의 건강정책웹진 'Healthy Sphere'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우리나라의 국제 개발 원조 참여가 증가하면서 저소득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하고 있다. 저소득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 특히 건강보장 체계에 있어서 세계보건기구(WHO)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보건기구는 전통적으로 의료적 접근을 우선해 왔고, 그 사이 World Bank, ADB(Asia Development Bank), GTZ(German Technical Cooperation) 등과 같은 기관들이 저소득 국가의 건강보장 체계에 대한 지원을 주도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기구들 사이에 보건의료 체계 혹은 건강보장 체계에 대한 접근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고, 또 최근 들어서는 이들 기구들 사이의 협력 또한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연금 논쟁 혹은 환자 부담금(user fee)과 관련된 논쟁에서 보였던 World Bank의 시장주의적 접근은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저소득국가 보건의료체계 ‘낙후 심각’

저소득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 특히 건강보장 체계는 과중한 본인 부담금, 분절된 체계, 그리고 정치적 갈등 등으로 특성지어질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 공공 병원은 이론적으로는 무료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비공식 부담금이 존재하고 또 공공 의료기관에는 의약품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이 의약품에 대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그 결과 재난적 의료비 지출이나 질병으로 인한 빈곤화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 과거 사회주의였던 국가에서는(예, 중국, 몽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근로자에 대한 건강보장 체계는 노동부에서, 그리고 비공식 부문에 대한 건강보장은 보건부에서 담당하면서 의료 체계의 분절화, 그리고 이에 따른 정부 부처 간 정치적 갈등이 만연한 실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지방 분권화가 중앙 정부 차원의 건강보장 정책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대안은 ‘조세+보험 건강보장 체계’

건강보장 체계의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는 어떤 형태의 공적 재원(즉 조세 혹은 사회보험)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최근 많은 저소득 국가에서 건강보험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보험료를 활용해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건강보험 조직을 구매자(purchaser)로 활용함으로써 기존 공공 병원 체계의 개혁을 꾀하는 것 역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빈곤층이 국민의 30~40%를 초과하는 저소득 국가들의 현실을 고려하면 순수하게 보험료에 기반한 제도는 현실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경우를 보면 비공식 부문 근로자에 대한 건강보험의 확대는 진전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조세에 기반한 제도 역시 현실성이 낮다. 많은 저소득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소득세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소득세가 그리 누진적이지도 않고 전체 조세에서 소득세의 비중이 낮은 결과, 조세에 기반한 건강보장 제도가 갖는 장점인 형평성이 실제로는 낮다.

또 공공의료 체계가 상당 부분 붕괴되어 있어서 조세에 기반한 supply-side financing의 효과성 또한 낮다.

따라서 저소득 국가에서는 조세와 보험을 결합한 건강보장 체계만이 대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국의 제도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데, 이는 주된 재원은 조세이지만 제도의 운영은 보험 제도의 구매 기능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공식 부문 근로자를 제외한 빈곤층과 비공식 부문에 대해 정부가 보험료를 납부해 주고 보험자가 구매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공공 병원의 주된 재원은 조세이지만 이것이 공공 병원에 대한 직접 예산 배분의 형태가 아니라 보험자를 통해 공공 병원에 지불되는 것이다.

최근 건강보험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는 중국의 비결 역시 자영자 보험료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다.

빈곤층 우선 배분 방식이 바람직

사회보험 방식을 통한 건강보장 제도에서는 전통적으로 근로자들을 우선적으로 커버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자영자나 비공식 부문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하지만 저소득 국가에서는 피용자에서 시작해 점진적으로 자영자로 확대하는 방식은 큰 한계를 가진다.

한국, 일본, 대만과 같이 빠른 경제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비공식 부문 근로자에 대한 보험 확대는 그 성공 사례가 드물다. 따라서 오히려 가용한 자원을 빈곤층과 비공식 부문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 그리고 국제 원조 역시 이러한 계층을 위한 건강보장 제도의 지원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제 원조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현재는 보건의료기관 건축이나 증축, 장비 제공, 관련 인력의 연수 교육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접근은 현지 수원국(受援國)과 지원 기관 모두의 정치적 이해에 부합한다.

즉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원조는 현지 정치인과 지원 국가의 입장에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물적 자원을 잘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체계가 없이는 그러한 원조는 곧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 선진국의 원조 사업은 이미 그 방향을 전환한 바 있다.

하지만 정책 지원과 보건체계 개발 지원으로의 전환은 지원국 입장에서 많은 전문성, 인력, 예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보건의료 분야 공적 원조 사업의 방향 전환을 위해서 많은 준비, 특히 장기간에 걸쳐 현지 사업 계획을 수립, 집행,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양성이 필요하다. 필요하면 외국의 전문 인력을 대폭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저소득 국가의 정책 개발을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나라 모형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공적 원조를 통한 정책 지원의 목적은 우리나라의 제도를 이식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나라의 현실에 맞는 제도를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분야에 있어서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도 중요하다. 저소득 국가의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석·박사 학위 논문이 많이 발표되어야 하고, 학계에서도 국제 개발과 저소득 국가 보건의료 정책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개발원조 관심 필요

국제 개발 원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개발의 의미가 무엇인가, 저소득 국가에 있어서 개발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 그래서 지원 국가들이 때로는 강요하다시피 하는 그것이 과연 현지 국민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들을 자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개발 원조에 투여되는 지원액이 커지면서 개발 원조가 거대한 산업으로 바뀌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기구뿐 아니라 이를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민간 컨설팅 회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개발 원조가 저소득 국가의 개발을 위해서가 아닌, 자칫 국제기구, 관련 업계, 나아가 저소득 국가의 관료들의 이해를 위해 사용되지 않도록 관심과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문성과 함께 저소득 국가들에 대한 진지한 애정을 가진 많은 보건 정책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의 활동을 기대한다.

권순만(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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