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웃음 - 홍상수의 [하하하]
상태바
담백한 웃음 - 홍상수의 [하하하]
  • 장현주
  • 승인 2010.05.17 23:49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말이라는 거.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한다.

웃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은 어떻게 웃는가?

입을 비틀고 웃음을 흘리는가? 실실 쪼개는가? 약간의 연륜과 초연함을 실어서 '허허허'이렇게 웃는가? 호호호 웃는가 아니면 비음이 섞인 높은 목소리로 '오-호호호'이렇게 웃는가?

홍상수 감독의 최신작 [하하하]에서 감독은 특유의 조롱과 냉소를 덜어내고 그답지 않게 상쾌하게 웃는다. 그늘 없이 웃는다. 낯설다. 그래도 왠지... 나쁘지 않다.

홍상수의 남자와 여자들은 항상 얄팍하고 천박하고 찌질했다. 남자들은 교수거나 감독이거나 이름이 좀 알려지다 만 예술가나 배우였기 때문에 더 얄팍해 보였다.

그 남자들의 작은 명성 주위에는 파리처럼 여자들이 꼬였다. 그녀들은 남자들을 밀어내는 척하면서 꼬시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뻔한 게임들을 했다.

나는 수준 높은 관객은 못되기 때문에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을 종종 감독 자신과 동일시하곤 했다.

사실 홍상수 인물들의 찌질함에 진력을 내면서도 그가 새 영화를 찍을 때마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그려내는 찌질한 인물들이 다만 감독의 거울상 일 뿐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을 제물삼아 우리 앞에 들이대는 나와 너의 자화상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홍상수가... 변한것일까?

[하하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통영의 향토문화재 해설가로 등장한 왕성옥[문소리 분]이다.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한번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낯선 여인. 아니 어쩌면 누구나 한두 번쯤 만나 보았음직한 인물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낮처럼 너무 밝은 것이 먹물들이 좋아할만한 미묘한 음영이란 게 당췌 없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심미안에 여간해선 포착되지 못했을 인물. 홍상수는 어떻게 이런 인물을 캐냈단 말인가. 그리고 문소리는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한단 말인가.

서울에서 교수이자 감독으로 일하던 조문경(김상경 분)은 조국을 뜨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8년만에 통영으로 향한다.

통영의 이순신 장군 유적지를 어슬렁거리던 조문경은 학생들을 앞에 놓고 손짓발짓으로 열변을 토하는 관광해설사 왕성옥을 보게 된다. (정확히는 그의 고운 종아리에 꽂힌다. 시작은 여전히 홍상수 답다.)

또 다른 날 우연인지 필연인지 스토킹인지 다시 찾은 그 장소에서 조문경은 다시 왕성옥을 만나게 된다. 성옥은 이순신의 행적이 후세에 의해 미화된 것이 아니냐는 관광객의 쓸데없이 날카로운(관광해설사에게 그따위 질문을 하다니 도대체 뭘 기대한걸까) 질문에 쓸데없이 울컥하다가 오늘은 더 못하겠다며 돌아선다.

그러다 문경과 눈이 마주친다. 문경은 흥분한 그녀가 왠지 귀엽게 느껴진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문경은 그녀의 뒤를 밟아 집까지 쫓아가기도 하고 이전 영화에서처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꼬시려고 해보지만 그녀는 이전 홍상수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그를 재미있게는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성적메시지를 보내지는 않는다.

애인이 못나게 굴자 홧김에, 술김에 문경에게 키스해버리지만 그녀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걸어서는 안될 길이 있다는 것도 안다. 술에 취했다고, 자기 애인이 못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녀는 찌질하지 않다. 그녀는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도 [하하하]웃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 내가 쫌 실수 했어. 인정! 더는 안되는 거 알죠? 여기까지 오케? 하하하."

성옥의 그런 담백함은 그녀에게 끌리는 두 남자의 반대 극점에 있다. 그녀의 밝음은 우울하고 복잡한 남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그녀의 시인 애인은 전형적인 홍상수의 남자다. 눈에 보이는 것, 말해지는 것의 이면을 항상 들여다 보려한다.

그는 꽃을 선물하는 성옥에게 "꽃을 꽃으로만 본다"며, 먹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대사를 쳐서 성옥의 분통을 터뜨린다. 성옥이 홍길동도 아닌데 왜 꽃을 꽃이라 부르면 안된다는 것인가. 까다롭기는.

보이지 않는 것, 말해지지 않는 것, 행간과 여백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왜 삶의 깊은 만족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걸까?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이 슬슬 짜증스러워 졌던 건 그의 통찰이 삶에 빛을 던지는 지혜나 성숙으로 발효되지 못하고 그저 툴툴대기나 하는 우울한 웅얼거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상수도 자신의 그런 우울한 성찰이 이제 지겨워졌던 것일까? 소파에서 졸던 조문경은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 꽤나 상징적인 조언을 얻게 된다.

"좋은 것만 보라, 슬프고 우울하고 어두운 것들은 위험하다"는. 영화에서 그런 좋은 것, 밝고 환한 것, 뒤끝 없고 이면이 없는 상큼한 것은 왕성옥이라는 인물로 체화되어 나타난다. 캐나다로의 탈출을 계획하고 있는 문경에게 성옥은 구원의 여인에 다름 아니다.

담백하다는 것은 맛없는 맛을 의미한다고 한다.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을 지워주는 시원한 산골 샘물 맛 같은 것.  감별하려는 노력 없이도 알 수 있는 단순하고 신선한 사람 맛. 왕성옥 한테서는 그런 사람 맛이 느껴진다.

그녀의 말투, 걸음걸이, 옷차림, 웃음,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담백한 인물의 특징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 도드라진다.

홍상수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끌리듯 나 역시 그녀에게 끌린다. 그리고 하하하는 그녀의 웃음소리 또는 그녀를 발견한 홍상수의 웃음소리라고 내 멋대로 상상한다.

아마 왕성옥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하하하가 뭐야 하하하가. 무슨 영화제목이 이래요? 좀 웃기지 않아요?" ㅎㅎ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임종철 2010-05-25 23:41:56
홍상수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을 없애주는 영화평이네요.

강민홍 2010-05-25 15:31:07
탄생이요~! 글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전민용 2010-05-24 23:05:54
함 보고싶네요. 지난 부처님오신날에는 홍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재밌게 봤는데... 이름도 재밌네 왕성옥이라... 줄거리로 보면 왕성욕은 아닌 것 같네요.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