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10]욕망에 귀기울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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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10]욕망에 귀기울이기
  • 전민용
  • 승인 2010.05.24 15: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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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저. 문학동네

 

▲ 은교. 박범신 저. 문학동네
역시 박범신 답게 힘이 있는 글이다. 단 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힘 말이다. 거의 하루 저녁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했다. 읽으면서 자꾸 박범신이라는 작가를 떠올렸다.

몇 년 전 ‘촐라체’를 읽고 잠시 동안 그 감흥에 빠져 지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작가 박범신은 없고 오직 히말라야에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두 남자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두사람의 처절한 사투와 기억과 인연과 죽음과 삶에 대한 절절한 기록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촐라체의 작가가 박범신이라는 것조차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이번에 ‘은교’를 읽으면서는 주인공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박범신이 자꾸 떠올랐다.

한 줄로 줄이면 여고생 은교를 사랑한 일흔살 할아버지 이적요 시인의 이야기인데 읽다보면 이적요 시인과 박범신이 자꾸 겹쳐지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소녀 ‘은교’, 은교를 사랑한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이적요 시인의 후배이자 객관적 관찰자 역할을 하는 Q변호사이다. 그런데 소설 속 화자는 노트와 일기 형식으로 자기 시점의 이야기를 하는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이 양자를 현재 시점에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Q변호사이다.

아쉽게도 은교는 이 세 사람의 서술 속에서만 등장한다. 은교의 진짜 생각이 뭔지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간접적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은교에 대해서는 궁금하기는 하지만 몰입할 수 없다. 서지우는 시인의 제자이자 시인 덕에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사는 인물이다. 이적요 시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시인의 사랑에 변화무쌍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조연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이적요 시인의 독백이고 이 소설은 그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설정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한 달 반 만에 다 썼다고 한다.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하고 싶었다고도 한다. 또 밤에만 쓴 소설이고 밤에만 읽기를 독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글쎄^^?

이적요 시인은 아들은 하나 있지만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며 한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는 투사로 살다 감옥에도 갔다 왔다. 치밀한 전략에 따라 시인으로 성공하고 사회적 의식도 훌륭해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풋풋한 여고생 은교가 그의 인생에 뛰어들고, 그는 지나간 모든 인생과 시는 다 거짓이고 오직 은교에 대한 사랑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고백한다.

열일곱 소녀에 대한 일흔살 노인의 사랑이라는 설정만 보면 매우 파격적이다. 무려 50년이 넘는 나이차를 뛰어넘어 어떻게 서로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가를 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것이다.

소설 끝까지 서지우의 죽음이 살인인지 아닌지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인과 은교의 관계로 보면 통속성을 뛰어넘는 파격을 보이지는 않는다. 욕망은 보여주지만 근원을 탐구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작가는 그의 책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갈망 3부작이라고 했다. 갈망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말을 하고 작용을 한다. 작가는 ‘은교’를 통해 늦기 전에 각자의 갈망이나 욕망에 귀 기울일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연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을 발견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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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0-06-05 11:59:00
좋죠. 소나무가 공해나 어떤 이유로 죽어가면 솔방울이 엄청 열리지요. 사람은 다르지 않나요? 어쨋든 한번 읽어 보고 싶네요...

장현주 2010-06-03 19:01:24
서평을 읽고 작년에 읽었던 [불안의 꽃]이라는 마르틴 발저의 책이 문득 생각나 다시 읽었답니다. 새삼스럽게 재미지네요. 이 책에서는 70대 노인과 30대 무명여배우의 연애가 이야기를 끌고가지요. 왠지 이적요시인의 결론이 [불안의 꽃]의 결말과 비슷한거 같아서 흥미롭네요. 불안의 꽃은 독일어 원제를 소설가 배수아가 의역한 것인데 전나무가 수명을 다하기 전에 갑자기 만개하는 현상을 말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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