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詩作法 강의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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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詩作法 강의 - '시'
  • 장현주 편집위원
  • 승인 2010.06.21 12:3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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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3종 세트의 마지막 작품, 이창동 감독의 "시"를 드디어 보아주셨다.

예술영화 전용관도 아닌 일산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뒤늦게나마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후광효과 때문이리라. 3종 세트의 짝을 맞춰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에 떠밀려 '보고야 말리라'고 작심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왜 선뜻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까? 조조와 점심타임에 하루 2번만 상영하는 이 영화를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전혀 도발적이지 않은 착한 제목에다, 당대의 일류 여배우였지만 이미 할머니가 된 윤정희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포스터는 솔직히 마음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이창동은 역시 이창동. 영화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적이고 윤리적이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불편하기도 했을 영화다.

‘시’는 주제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수놓아져 있다. 꽃미남도 꽃미녀도 없고 웃기지도 짜릿하지도 않은 착한 영화, 스트레스 해소차원에서 보기엔 부담스러운 영화임엔 분명하지만 각본이 훌륭한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데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작지원사업 심사에서 빵점을 맞았다니 놀랍다.

심사위원들의 공감능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성격장애 환자들이 보통 그렇다 든데.. 독자제현들의 주체적 판단을 위해 꽤 긴 분량의 영화줄거리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방 소도시에 여중생의 투신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아비 없는 가난한 집안의 여식이었던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그녀가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한편, 여기 가난한 집안의 아비 없는 자식이 하나 더 있다. 자살한 여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욱이. 소년의 어미는 남편과 이혼해 멀리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녀석은 소녀처럼 고운 외할머니랑 같이 산다. 얼마 전 부터 자꾸 단어를 잊어버리는 할머니는 풍 맞은 동네 할아버지의 간병인으로 취직해 생활비를 벌고 있다.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그녀는 문화센터의 시 강좌 포스터를 보고 등록하게 된다.

강의를 맡은 시인은 시를 쓰는 작업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발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성실한 학생인 할머니는 시인의 말대로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도무지 시는 써지지 않는다. 또는 시상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에게 첫 번째 시상이 떠오른 것은 손자가 죽은 여중생의 가해학생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다.

가해 남학생들의 아비들이 모여 첫 번째 대책회의를 하던 식당에서,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자리를 빠져나와 식당 밖의 맨드라미를 바라보며 첫 번째 시상을 떠올린다.

피처럼 붉은 꽃. 그녀는 관심을 보이는 한 학부형에게 말을 건넨다. "맨드라미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방패"

할머니는 합의금을 마련할 방도를 도무지 찾지 못하고 시는 여전히 써지지 않는다.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의 합의는 공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60이 넘은 그녀에게도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다. 풍 맞은 노인네가 먹여달라고 우기던 알약이 사실 비아그라였던 것. 노인네를 목욕시키다 발기한 그것을 본 그녀는 질겁을 하고 유일한 생계수단이던 간병을 때려치운다.

그녀는 시를 쓰고만 싶은데, 어디서고 아름다움은 발견되지 않는다. 시가 방패라도 되는 듯 매달리지만 시는 써지지 않고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내면의 죄책감으로 부터 도저히 숨지 못한다.

죽은 소녀의 위령미사에 몰래 끼어든 그녀는 자신을 훔쳐보는 소녀 친구들의 눈짓이 부담스럽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가다 입구 쪽에 놓아둔 소녀의 사진을 훔쳐 가방 속에 쑤셔 넣는다. 버스를 타고 소녀가 투신한 다리 위를 서성인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는 유령 같은 몰골로 풍 맞은 노인네를 찾아간다. 신비의 영약 비아그라를 먹이고 옷을 벗긴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한번만 해보는 게 소원이라던 노인네의 원을 풀어준다.

그녀도 사실은 죽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뜬금없이 웬 노인네들의 섹스신이냐고? 치매가 맞긴 맞나 보다고? 합의금을 마련하려는 고육지책일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부채의식과 죄책감, 속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마치 합의금  삼천만원에 자식들의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애정 충만한 놈들의 아비들처럼.

너무 미안해서, 너무 죄스러워서 차라리 똑같이 더러워지고자 하는 마음. 똑같이 능욕당하고자 하는 심정. 그녀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합의금을 마련할 길이 없고 가해자 대책위는 대단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불쌍함으로 불쌍함을 덮는 전법이다. 생활보호 대상자에다 혼자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를 사절로 보내 죽은 여중생의 엄마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한 것.

단단히 맘을 먹고 나섰던 할머니는 따뜻한 봄바람에 난데없는 시심, 잠복해있던 치매 끼 까지 발동하여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만다. 죄책감에 짓눌려 다 죽어가는 행색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할 여중생의 어미에게 봄 마중 나온 팔자 좋은 할머니마냥 웃음 가득한 얼굴로 화사한 인사만을 건네고 돌아선다.

“날씨가 참 좋죠? 그럼 수고 하세요- ” 제 정신을 차린 건 이미 일을 그르친 다음이다.

다시 그녀는 어느 시낭독회가 열리는 카페에 있다.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 그녀는 낭독회가 끝난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어두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낀다. 동호회 회원이기도 한 아무개 형사가 담배 피러 나왔다가 그녀를 본다.

“누님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암전 -

한편 대책위에서는 처음으로 피해자 측과의 정식 만남을 주선하고, 죽은 애 어미의 망연한 눈길을 받아내지 못하는 그녀는 황망히 자리를 뜬다.

결국 풍 맞은 노인네를 찾아가 합의금을 마련해 대책위에 건네고. 합의는 말끔히 끝난다. 가해자 측은 축제분위기다. 그녀는 합의가 정말. 그렇게 말끔히.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녀는 손자에게 피자를 사준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며 구석구석 깨끗이 몸을 닦아야 한다고, 몸이 깨끗해야 마음도 깨끗한 거라고 이른다.

어둑한 저녁 할머니와 손자는 그림처럼 배트민턴을 친다. 틱톡 틱톡. 배드민턴을 치는 그들 옆에 자동차가 와서 조용히 선다. 두 명의 형사가 내리고 할머니가 나무에 걸린 셔틀콕을 내리려 애쓰는 동안 손자는 형사 한명과 차에 올라탄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시 동호회의 아무개 형사가 손자를 대신해 시 쓰는 누님과 배드민턴을 친다. 틱톡 틱톡.

시 강좌의 마지막 날. 과제물인 시 쓰기를 완수한 등록회원은 그녀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녀는 없다. 꽃다발과 시편 하나를 남긴 채 그녀는 자취 없이 사라진다.

대문을 나서다가 봄바람에 홀려 돌아오는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소녀가 떠나간 강물 속으로 함께 떠나갔는지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녀는 이제 시를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더럽히고 사랑하는 외손자를 기어이 소년원으로 보낸 그녀는 이제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창동의 ‘밀양’을 기억하는지. ‘밀양’이 용서에 관한 영화였다면 ‘시’는 속죄에 관한 영화다. 이창동의 영화는 내내 과거의 부채의식, 죄와 벌, 용서와 참회의 정서 사이를 맴돈다.
이창동은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진정한 사과 없이 진정한 용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무얼까. 영웅적인 행동, 세간에서 칭송받는 미담 속에만 아름다움이 있을까.

영화 ‘시’는 고통 속에서만 드러나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고통은 상처받은 자의 고통이 아니라 상처 입힌 자의 고통이다. 외면하고 덮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고통. 그 갈등이 주는 지극한 긴장과 상처받은 자의 고통에 대한 내밀한 공감 속에서 진정성은 싹튼다. 상처 입힌 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건 이 씻어낼 수 없는 진심 한 자락 때문이다.

상처  입힌 자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 고통의 진정성이 전달될 때 뿐 이다. 그때야 비로소 인간의 가슴 속에는 시심이 깃든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능력과 권리가 생긴다. 그게 성폭행 가해자의 부모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아름다운 인간들은 합의가 아니라 속죄를 하는 법이다. 비록 많은 가해자들은 속죄가 아니라 말끔한 합의를 원하지만 말이다.

‘시 쓰고 자빠졌네.’라는 막말은 아마도 이 속죄가 빠진 합의, 립 서비스에만 재능을 발휘하는 후자의 인간들 때문에 생겼지 싶다.

깊은 산속에 겨우 겨우 고이는 작은 옹달샘을 퍼내듯, 달랑 시 한편 남긴 과작(寡作)시인 윤정희는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이창동의 시작법(詩作法) 강의도 끝난다. 시는 단순히 [쓴다는 행위]이상의 예술, [삶을 요구하는 예술]이라는 묵직한 부담을 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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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0-06-22 10:38:03
난 밀양은 전도연이 연기는 잘했다고 보지만 시나리오는 별로였다. 종교에 대한 이해가 좀 얕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물론 이번 '시'에서 처럼 눈높이를 보통사람들의 공감으로 맞추려 해서일수도 있다는 생각도든다. 시에서는 욱이가 중요하다고본다 할머니가 여러차례 여러방법으로 욱이의 진정한 참회를 끌어내려했지만 욱이나 친구들은 그저 무심하거나 히히덕댈 뿐이다 무엇이 욱일르 이렇게 만들었을까하는 것은

전민용 2010-06-22 11:21:34
감독이나 할머니의 관심 밖인가 보다. 어른들은 그렇다치고 아이들까지 집단성폭행에이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에 대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게 가능한 설정일까 의문이 든다. 할머니는 엄마나 선생님하고도 의논하지않고 혼자 판단하고 조금 노력해보다 포기하고 법의 힘을 빌어 참회를 강제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은 손자 대신 속죄하고 몸을 던진다. 대속인데..시쓰듯 감정과마음이 가는대로간 결과일까?

박 기자 2010-06-24 14:00:15
이 영화 나중에라도 보러갈 건데 글 앞부분 읽다보니 왠지 스포가 있을 것 같아 못읽겠네요,,ㅎㅎ

문세기 2010-06-25 14:59:33
이 영화도 '밀양'처럼....한 번 보면 다신 보기는 힘든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밀양'은 참 영화 잘 만들었다고 생가하면서도...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 때문에 또 볼 수가 없더군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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