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窓> 민주화와 ‘뉴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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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窓> 민주화와 ‘뉴 라이트
  • 인터넷참여연대
  • 승인 2004.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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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세력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다. 이른바 ‘뉴 라이트’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신우익’이다. ‘신우익’의 등장으로 기존의 우익은 졸지에 ‘구우익’이 되어 버렸다. ‘낡은 우익’, 곧 ‘시대에 뒤쳐진 우익’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신우익’이 ‘구우익’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기존의 우익이 ‘시대에 뒤쳐진 우익’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우익’의 주장을 보노라면, 왜 ‘신우익’이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은 극우와 수구좌파를 모두 극복하겠다고 한다. 말인즉슨 좋은 얘기이다. 극우나 극좌는 다 큰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자.

불과 10여년 전까지 우리의 현대사는 부패하고 무능한 극우세력이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의 역사였다. 극우와 독재는 한 몸이었다. 민주화를 통해 극우는 정권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의 곳곳에서 지배세력으로 행세하고 있다.

‘신우익’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연대에서 행한 유근일의 ‘축사’에서 잘 드러나듯 ‘신우익’은 ‘수구좌파’와 맞서 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수구좌파’는 누구인가?

자유주의연대는 노무현 정부와 386세대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와 신개발주의 정책을 맹렬히 펼치고 있는 노무현 정부를 ‘수구좌파’로 몰거나, 386세대를 좌파요 친북이라 우기는 것은 ‘구우익’의 케케묵은 색깔론이 아니었던가? ‘신우익’은 간판을 바꿔 단 ‘구우익’일 뿐이다.

‘구우익’은 왜 ‘신우익’으로 간판을 바꿨을까? 여기에는 무엇보다 민주화라는 역사적 변화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와 함께 ‘구우익’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났다. ‘친일-독재 기득권세력’이 그것이다. ‘구우익’은 입만 열면 자유를 외쳤지만 사실은 폭력을 사용하여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친일-독재 기득권세력’이 다수의 국민을 멋대로 억압하고 부패하고 축재할 자유였다. 그들은 자유의 이름을 더럽혔다. 이런 사실이 다 드러났으며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급기야 ‘간판 바꿔 달기 전술’을 이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신우익’이라는 새로운 간판은 ‘구우익’의 정치적 실패와 역사적 패퇴의 산물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신우익’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었어도 ‘친일-독재 기득권세력’은 ‘친일-독재 기득권세력’일 뿐이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꼬리를 잘라내고 간판을 바꾸는 것으로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신우익’을 둘러싼 최근의 소란을 보노라면 과연 조중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신우익’의 주장과 행태가 ‘구우익’과 다른 것이 전혀 없으니, ‘신우익’이라는 말은 그저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다. 반공주의를 내세워 사람들을 협박하는 것이나, 시장주의를 내세워 불평등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것이나, 성장주의를 내세워 복지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것이나, ‘신우익’은 철저히 간판을 바꾼 ‘구우익’일 뿐이다.

‘신우익’을 미국의 ‘네오콘’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신우익’이 ‘네오콘’을 흠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네오콘’이 ‘신우익’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둘을 비교하는 것은 ‘네오콘’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판을 바꿔 단 ‘구우익’인 이 땅의 ‘신우익’은 도저히 ‘네오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식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사업에 실패하고 부인과도 별거하게 된 어떤 남자가 자기 이름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며 법원에 개명허가청구를 했다는 보도 쪽에 더 이끌린다. ‘구우익’의 간판 바꿔 달기와 그 남자의 이름 바꾸기는 잘못된 대응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우익’이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신우익’은 간판을 바꿔 단 ‘구우익’일 뿐이다. ‘올바른 우익’은 무엇보다 먼저 민주주의를 존중해야 한다. 이 땅에서 그 시금석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태도이다. 또한 ‘올바른 우익’은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서구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 우익은 ‘민족주의 전사’들이다.

우리의 ‘구우익’은 반민주 반민족 세력이었다. 그들이 비난해 마지않는 노무현 정부야말로 ‘올바른 우익’에 가깝다. ‘올바른 우익’을 ‘수구좌파’라 욕하며 ‘신우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나선 ‘구우익’에게는 사실 어떤 희망도 없다.

민주화는 ‘친일-독재 기득권세력’의 지배가 약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아직도 강력하다. ‘신우익’으로 간판을 바꾸는 것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하다. ‘신우익’의 이름으로 정책논쟁을 가장한 이념논쟁을 다시 불붙일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하다. ‘신우익’은 우리의 민주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해준다.

홍성태(정책위원장, 상지대 교수)  ⓒ 인터넷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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