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예수'와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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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예수'와 국가보안법
  • 이우리
  • 승인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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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열 옮김. 한길사

얼마 전 상지대 김정란 교수가 인터넷매체에 올린 칼럼 <극우기독인에게 고함-“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예수의 삶’에 대한 해석과 ‘현실에의 적용’을 둘러싼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이 논란은 인류역사 상 최고의 문제적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역사속의 인물,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전무한 우리 사회(특히 기독교계)에서는 매우 생뚱한 논쟁거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예수가 진정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김정란 교수가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런’ 삶을 살아왔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신학상의 해석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을 뿐,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김정란 교수의 ‘예수의 삶’에 대한 해석이 ‘현실 속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인간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신학적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의 인간, 예수’가 정녕 김교수의 지적처럼 ‘그 시대의 반항아, 혁명가'의 삶을 살아왔을까? 그러나 역사 속에 실재했던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고자 하는 역사학에서는 이런 식의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는다. 관심이 있다면 오로지 ‘역사 속의 인물인 예수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그 시대속의 반항아, 혁명가였을까?’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실로 가열차게 벌여나갔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란 인물을 ‘아주 단호하게’ 내팽겨쳐 버리고 말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정답은 유감스럽게도 예수가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후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인류를 해방(구원)할 유일무이한 ‘메시아’로 추앙하고 있는 ‘신의 아들’ 예수를 왜 유독 유대인들은 같은 종족임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에 답하고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인류 역사상 최초의 형태인 ‘중세 기독교의 무시무시한 마녀사냥’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함께 내리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암흑의 시대’인 중세의 ‘마녀사냥’은 우리의 ‘국가보안법’처럼 체제외적인 ‘외부의 적’에 대한 방어기제가 아니라 체제내적인 ‘내부의 적’을 억압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였다. 한마디로 말해 ‘북한 괴뢰도당’을 섬멸하기 위한 실정법이 아니라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국민)’의 단결을 저해하고, 또 그들을 이리저리 분열시켜 놓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역사 속에서의 ‘예수’의 삶과 그에 뒤이은 ‘중세의 마녀사냥’은 그저 한 부록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화-얼핏 보기에는 매우 미개한 듯이 보이기도 하는 (원시시대 미개인들의) 문화 양식’이 모두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인류(작게는 해당 종족)가 고안해낸 최고, 최대의 ‘발명품’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요즘 일종의 ‘유행’을 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이 이처럼 절묘하면서도 오묘할 수가 있을까? ‘왜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고, 또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등등 얼핏 기이하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원시시대 이래 인류의 여러 문화현상들을 그 시대의 상황과 생산력수준에 걸맞는 인류의 행동방식으로 정식화 해내고 있는 이 책의 미덕은 안타깝게도 앞에서 언급한 ‘예수’시대와 그 뒤를 이은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그치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안타까움이 이 책의 미덕을 모두 다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뒤의 인류문명의 발전이 너무나 복잡해졌고, 또 그러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지적 노력으로는 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밝혀내기가 당연히 역부족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뒤, 이 책을 그냥 덮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깝고, 또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인류는 ‘신의 아들, 예수’처럼 항상 부활하기 마련이다. 그가 밝혀내지 못한 수많은 인류의 문화현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숨은 비밀(수수께끼)’들을 밝혀내는 것! 그것은 앞으로 우리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 또, 그렇다면 ‘21세기, 우리 인류의 새로운 문화양식’의 창조는 진정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첫째, 지구의 자원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현재 인류의 생산력의 발달 수준은 거의 무한정으로 발달하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하루 8시간 이상 일해 버린다면 전 세계 인구가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는, 최소 몇 십 배 이상의 물품들을 생산해내고야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인류는 어떠한 문화양식을 새롭게 창조해내야만 하는가? ‘생산의 자유’를, 그리고 이에 따른 ‘소비의 미덕’을 최우선의 지고지선의 과제로 삼아왔던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은 21세기로 들어선 현재 인류의 생산력 수준 앞에서 과연 어떠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IMF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된 생활방식과 세계화, 신자유주의로 이어져 오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양식은 이제 우리 앞에 이러한 질문을 던져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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