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16]화제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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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16]화제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 전민용
  • 승인 2010.08.10 10:5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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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최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4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부터 논의를 끌어간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 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분배 원칙을 만들어야 하는가? 저자는 이 간단하지 않은 화두를 끝까지 붙잡고 다양한 사례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벤담과 칸트와 롤스 등의 이론들을 설명하며 계속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극대화하고 자유를 존중하고 미덕을 기르는 행위의 의미와 규정이 사람들 사이에 서로 충돌한다. 이 책은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장단점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지 집요하게 추궁해 나간다.

먼저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어떤 정책을 통해 얻는 이익을 다 더하고 거기에서 총비용을 빼서 이익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리적인 정책인 것이다. 이 사상은 현재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민 주권시대에 가능한 많은 국민들의 이익에 기여하는 정책의 선택을 누가 쉽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박은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쉽지 않은 논쟁거리이다. 체니 전 미국부통령은 소수의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에게 강력한 고문기술을 사용한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와 고통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국민 중에는 이런 공리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테러리스트의 입을 열기 위해 죄 없는 그의 가족을 고문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극심한 고통 속에 나오는 자백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우리가 고문에 의존하면 우리 군인이 포로로 잡혔을 때 더 혹독한 대우를 각오해야 한다는 실용적인(공리적인) 이유로 고문을 반대하는 공리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공리주의자들은 고문 행위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공리주의와 다르게 고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리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은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두 번째 문제에 대해 계산적인 원칙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원칙을 통해 공리주의를 다듬어 살리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야 하고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은 벤담과 달리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의 구별처럼 질을 평가하려 한 것이다.

자유지상주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내 몸은 나의 것인가? 대부분의 국가가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하는 장기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해마다 수천 명이 신장 이식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있다. 시장에서 매매가 된다면 신장 공급이 늘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장 매매 허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유지상주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들은 목숨을 구하는 도덕성, 신장은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 한다. 하지만 2001년 독일에서 일어난 성인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식인 행위처럼 자기소유권이라는 자유지상주의 원칙은 무한정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정의를 둘러싼 공방에서 자주 거론되는 시장의 역할에 대해 다양하게 질문한다. 자유시장이 공정한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사서는 안 되는 재화도 있는가? 왜 문제가 되는가?

현재는 유급 자원군제이지만 미국에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병역 방법이 있다. 남북전쟁 때의 병역제도인 유급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제와 (유급)자원군제 그리고 (강제)징병제 이다.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 논리로 보면 노동시장에서 자유롭게 고용하는 자원군이 최고의 선택이고 강제 수단을 동원하는 징병제는 최악의 선택이다.

하지만 사회의 제반 여건이 상당 부분 평등하지 않다면 징병제는 법이,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하는 즉 강제의 형태만 다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자원군 구성 계층을 보면 저소득층에서 중간 소득층 지역 출신 젊은이의 비율이 현격히 높다. 프린스턴 대학을 보면 1956년에는 졸업생의 과반 이상이 군에 입대했지만 2006년에는 1%도 되지 않는다. 의회 의원 가운데 자녀가 군에 가는 경우는 2%도 안 된다. 자기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군을 미국식 자원군제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는데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시장을 통해 고용하는 자원군제에 대해 다른 반박도 있다. 모든 시민은 나라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군 복무는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이다. 의무를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배심원은 시장제도에 맡기고 있지 않다.

다음은 대리모 거래에 대한 논란이다. 대리 출산 계약은 강제할 효력이 있는가? 대리모가 친권을 주장한다면? 자발적 합의라면 문제가 있는 합의라도 인정해야 하는가? 자궁대리모와 난자까지 제공하는 대리모의 차이는 있는가? 인도 같은 외국에서 하고 있는 체외수정 대리임신은? 현재 유럽의 많은 국가는 상업적 대리 출산을 금지한다. 미국은 10여 개 주가 합법화했고, 10여 개 주가 금지했으며, 다른 주들은 애매하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그 이유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이고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처럼 개인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 역시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물론 책에는 칸트의 주장에 대한 한계와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고 있다. 더해서 칸트는 왜 자유 성관계를 반대할까? 칸트라면 빌 클린턴을 옹호했을까?(놀랍게도 내용을 보면 이런 종류의 거짓말에 대해 칸트는 긍정적이다.) 흥미 있는 내용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하는지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칙을 정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무지의 장막” 뒤에서, 즉 계층, 성별, 인종, 정치관, 종교관 등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말 그대로 평등한 위치에서 원칙을 합의한다면 공정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추론하여 롤스는 정의의 원칙 두 가지를 정립한다. 하나는 언론이나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원칙이고 두 번째는 사회, 경제적 평등에 관한 것으로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하지는 않더라도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이다.

시민들은 기본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고, 소득과 부의 분배는 자유 시장에서 결정되는 방식의 기회 균등을 공식 인정하는 자유지상주의 정의론이 있다(우리나라는 아직 이 수준에도 미달이지만...). 다음은 부모의 부나 교육 환경 등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자유 시장 체제의 불공정을 다양한 제도를 통해 바로잡는 모든 사람이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동일한 출발선에 서서 경쟁할 수 있는 능력위주 사회가 있다. 롤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능력 위주 사회가 사회적 우연을 제거한다 해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라는 개인적 우연이 불공정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롤스의 ‘차등원칙’은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에 대한 평가 등 롤스의 주장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를 따라가 보는 재미도 그럴 듯하다.

대학 입학 등에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정의로운가? 권리 침해는 없는가? 인종 통합 공동체를 목표로 한 뉴욕의 ‘스타렛 시티’ 아파트의 백인 우대정책은 타당한가? 기부금을 통한 기여 입학제는 정의로운가? 더 나가서 아예 일정 비율을 경매로 입학자를 뽑는다면?

“정치의 목적은 경제적 풍요나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우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 공직과 영광은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공동선을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인데 동의가 되시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고와 본성에 대한 적합성을 중요시 했다. 정의든 국가든 권리든 텔로스(목표, 본질)를 먼저 이해하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행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권리에 대한 논쟁은 결국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분배 원칙, 명예나 포상을 주는 근거 등에 대한 논란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국가나 법이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거론하지 않고는 공정성이나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독일은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2차 대전의 여러 범죄적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 미국은 노예제에 대해,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한 것에 대해 공식 사죄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원주민에 대해 공식 사죄했다. 일본은 사죄하는데 인색한 국가이다.

조상의 죄에 대해 후손이 사죄해야 하는가? 배상을 한다면 아무 책임도 없는 현재 시민들의 돈을 사용해야 하는데 정당한가? 도덕적 개인주의 차원의 문제제기이다. 이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근현대 정의론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존 로크나 칸트, 롤스의 정의론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나 법 역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을 경계해서 특정한 도덕적, 종교적 이상을 권장해서는 안 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칸트나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시민 스스로가 정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단적 책임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공동체가 주는 부담이 억압적일 수 있다는 비판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을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 대신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답하려면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먼저 답해야 한다. 나는 가족, 친족, 부족, 나라에 둘러싸인 사람이고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빚과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도 물려받는다. 현대의 개인주의와는 분명히 차이가 나지만 사회계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의무인 연대 의무 또는 공동체 의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해석이다.

이어지는 질문들. 애국심은 미덕인가? 국산 애용운동은 정당한가?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마지막 질문에만 답한다면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죄나 배상, 미국인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도 애국심과 연대의식에 기초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점이다.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존 F.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는 양극단의 견해를 보인다. 케네디가 카톨릭 신자라 다수인 개신교 신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지만 정부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 무엇이 좋은 삶인지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는 당시 철학의 반영이기도 하다.

반면 오바마는 자유주의적 중립을 거부하고 진보주의자들은 더 큰 아량을 베풀고 신앙 친화적인 공적 이성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보고 오바마의 견해를 지지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중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으로 1. 시민의식, 희생, 봉사의 확대 2.시장의 도덕적 한계 극복 3. 불평등의 개선과 연대 의식의 강화 4. 도덕이나 바람직한 삶에 개입하는 정치를 예로 제시하고 있다.

소개하고 싶은 사례들이 더 많은데도 글 길이가 늘어나 참았다. 흥미 있는 생생한 사례들을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꼭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처음에 다소 산만해 보이는 주제들이 후반부에 가서야 정리가 되고, 더욱이 저자의 결론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더 잘 번역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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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짱 2010-09-06 17:23:40
좋은 책이라기보다 좋은 강의는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 읽으신 후에는 동봉된 DVD를 꼭 보세요. 놀랍더군요.

김형성 2010-08-16 23:30:11
TV 책을 말하다에서도 소개되었던 그 책이네요. 두께가 ㄷㄷㄷ

강민홍 기자 2010-08-10 12:29:59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는데, 정말 너무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아직 끝까지 안읽었는데, 결론이 위 4가지로 정리된다니.....좀 싱겁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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