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 사이비 민족주의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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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프리즘> 사이비 민족주의를 우려한다
  • 인터넷참여연대
  • 승인 2004.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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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선 요즘 민족주의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해체하자는 목소리가 드높다. 본시 ‘○○주의’라는 것엔 무언가를 절대시할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으므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민족이라는 협소한 틀을 넘어 인류전체의 행복을 추구하자고 주장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민족이라는 명분 하에 함부로 개인을 억압해온 잘못된 민족주의를 물리치자는 데도 쌍수 들고 환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달 전 과거사 진상규명문제를 다룬 MBC토론에서처럼 정신대할머니들의 아픈 가슴을 함부로 후벼 파선 곤란하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해체하자는 입장이라면 식민지권력이나 군사독재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마땅하다. 일본민족을 위해 조선민족을 억압했거나 민족의 이름 하에 민중을 억압했던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과오를 조사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에 출연했던 민족주의 해체론자가 취한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국가권력을 신성시하는 극우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그런 조사를 영 마뜩찮아 했던 게 아닌가. 민족주의 해체론자들은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를 너무 우습게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선 민족주의가 해괴하게 악용당하고 있다. 외국자본이 범람하면서 ‘사이비 민족주의’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식으로 노동자를 쉽게 목 자르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아우성치던 재계가 재벌개혁은 미국식이므로 반대한다고 나섰다. 그리고 불법을 저지른 재벌총수가 외국자본에 의해 퇴진을 요구받자 마치 우리 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당한 것처럼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박정희가 친일파이면서도 정권이 어려움에 처하자 반일관제데모를 부추긴 것과 마찬가지다.

수구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조선일보로 말하면 민족주의 해체론을 열심히 띄워준 신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재벌개혁에 반대키로 작심한 탓인지 민족주의에 기대어 재벌총수의 경영권수호에 한몫 하고 나섰다. 체면치레용인지 가끔 다른 입장의 칼럼이 실릴 때도 있지만. 다른 수구신문들은 재계 아첨에 더 노골적이었다. 공정거래법 개정과 관련해 ‘민족자본 지키기,’ 정확하게 표현하면 ‘재벌총수 지키기’에 혈안이 될 정도였다.

재계나 수구언론이나 원래 그렇고 그런 집단이므로 어쩔 수 없다 치자. 정작 더 큰 문제는 과거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일부 인사들의 행태다. IMF사태 이후 외국자본이 떼거리로 몰려들면서 이들은 경제종속의 위험성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우리경제의 허점을 노려 차익을 챙겨가는 투기자본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정당한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외국자본에 대한 우상숭배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점차 크게 ‘오버’하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낡은 재벌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외국자본이냐 재벌이냐’의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어놓고는 외국자본보다는 재벌이 낫지 않느냐고 외친다. 그리하여 전경련과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삼성 연구소나 수구 시민단체의 간부와 손잡고 공동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런 주장의 리더 격인 이찬근교수는 총수의 경영권을 지킨다며 “1938년 스웨덴의 살쵸바덴 협약에선 정부와 발렌베리 가문이 경영권보호와 노동권 인정 등을 타협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2001년 재벌개혁이 후퇴하기 이전으로 원위치 시키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해서조차 한사코 반대하기에 이른다. 옛날에 마르크시즘을 연구하던 정운영 교수가 12월 8일 중앙일보에 쓴 칼럼이 그 대표다. 나라를 위하자며 재벌총수를 지키자고 나선 것이다. 물론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전경련과도 손잡을 수 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유연한 자세를 가질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들 말대로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을 빙자해 낡은 재벌체제를 존속시키는 것은 기업의 도산확률을 높여 재벌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사이비 민족주의다.

재벌들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으로 국민이 도탄에 빠졌던 IMF사태를 벌써 잊었는가. 재벌체제를 지키자는 것은 사실은 재벌기업을 외국자본에 넘겨주자고 재촉하는 것일 뿐이다. 김우중씨가 대우차를 함부로 운영하지만 않았더라도 대우차가 GM에 꼭 넘어갈 이유가 있었을까. 재벌총수를 지키자는 사이비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은 김우중씨의 예에서 보듯 재벌총수조차 망치는 길이다. 반면 재벌개혁은 재벌을 거듭나게 해 나라와 기업은 물론 총수도 살리는, 모두의 윈윈(win-win) 게임이다.

돌이켜보건대 IMF사태 초기엔 ‘외자유치야말로 살 길’이라는 외자 우상숭배론이 판쳤다. 그러더니 요즘은 ‘외자유치야말로 죽을 길’이라는 외자 마녀사냥론이 득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정신분열증이 관계․정계․재계․언론계․학계에 만연해 있다. 이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우선 우상숭배론이나 마녀사냥론 같은 미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외자의 장점이나 폐해를 침소봉대하거나 날조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과 개방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IMF사태는 근본적으론 재벌체제와 금융체제가 낡았기 때문이지만, 그런 가운데 함부로 대외개방에 나선 것도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개혁수준에 비해 개방이 다소 과도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외국인의 주식보유비중은 지나치게 높다.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배도 걱정스런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기판에서처럼 개방을 물리고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안다. “2005년 1월 1일부로 외국자본은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 남은 길은 개혁을 개방에 맞게끔 진척시키는 방법뿐이다. 외국자본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같은 외국자본이라도 진출국가의 경제수준에 따라 장점이 나타날 수도 있고, 폐해가 두드러질 수도 있다. 금융과 관련된 여러 부작용들은 특별히 외국자본을 배척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법률을 정비․개혁하면 해소할 수 있다. 최근 물의를 빚은 론스타의 행태도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에 관한 원칙을 제대로 실천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과거 외자를 유치하려고 특별대우 해줬던 조항들은 이제 정리해가야 한다. 외환보유고가 넘쳐 처치곤란한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외국인이 배당금으로 수조원이나 가져간다”고 대서특필해 사람을 현혹하는 따위의 유치한 작태는 중단해야 한다. 외국인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주식보유 비중대로 배당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게 한국금융시장에 주는 혜택 이상인가 여부이지 그 크기 자체는 아니다.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다. 퇴행적 재벌체제로의 복귀는 반(反)개혁으로 개방에 대처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파탄나기 마련이다. IMF사태나 조선왕조 말 쇄국정책의 결말을 보라. 그리고 현재 우리의 경영권 방어시스템도 외국에 비해 그다지 취약하지 않다.

우선주와 보통주의 차등의결권제도를 비롯해 지분대량변동 보유신고제, 이사 시차임기제, 자사주취득제 등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공시 시스템의 일부 개선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상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들 이미 외국인지분이 많아진 기업에는 쓸모없으며, 총수의 우호지분이 압도적인 회사에서는 기존제도 하에서도 정관변경으로 경영권을 더 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유지로 경영권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계열사관계가 더 복잡해지고 소유구조에 약한 고리가 생겨 오히려 경영권공격을 당하기 쉬울 수도 있다. 이 경우 황제경영이 심화되어 도산확률이 높아지는 폐해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게다가 금융계열사 의결권문제와 관련해 삼성전자의 경영권위협을 들먹이지만, 이는 근거가 박약하다.

왜냐하면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대주주들은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구조조정펀드가 아니며, 이사의 시차임기제가 시행되고 있고, 유사시에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우호적 기관투자가에게 넘길 수 있는 등 여러 이유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운영교수는 삼성전자의 본사이전 운운하고 있는데, 이는 정관변경사항이고 현재의 소유구조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성이 난리치는 것은 시민단체 등에 의한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을 우려하기 때문인 듯싶은데, 기업을 이롭게 하는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을 막아야 하는가. 전경련 아니 삼성 멋대로 하므로 삼경련이라 불러야 할 조직이 국민연금 의결권을 제한하자고 자가당착을 일으키는 것도 국민연금이 삼성전자 주총에서 참여연대의 주장에 동조한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해선 안 되는 것처럼 경영권이 지나치게 불안해서도 곤란하다. 그러나 경영의 안정성은 경영의 책임성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 부패 무능한 총수는 기업이 망하기 전에 퇴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재벌개혁이다. 투기적 외국자본에 의한 부당한 경영권공격이나 과도한 국부유출을 막으려면, 재벌개혁에 의해 기업가치를 높이고, 국내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민주적 우리사주조합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게 정공법이다. 엉뚱한 사술(邪術)을 쓰려 해선 곤란하다. 그리고 우리 기관투자가는 부당한 경영권공격은 막아내되, 부패 무능한 총수축출에 반대해선 안 된다. 외국자본이냐 재벌이냐의 잘못된 이분법을 벗어나, 외국자본은 주체적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재벌은 선진적 대기업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글로벌시대에 민족주의가 갈 길은 어딜까. 극우국가주의를 내세우는 민족주의해체론도 아니며, 개혁반대의 핑계로 애국을 내세우는 사이비 민족주의도 아니다. 진리는 역시 서커스 외줄타기이다. 지금이야말로 어느 쪽으로도 굴러 떨어지지 않는 진정한 민족주의를 모색할 때다.

김기원(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실행위원)     ⓒ 인터넷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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