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를 뭍으로 데려온 착한 청년은 왕자가 아니었다. 물질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꼿꼿한 등과 선한 눈매는 이제 구부정한 슬픈 등이 되어 티비를 보며 허허로이 웃고, 오랜만에 가족 외식에서 소주 몇 잔에 눈물을 흘린다. 싱그럽게 물길을 가르던 소녀는 팍팍한 일상의 무게아래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는 억척스러운 여인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가난한 부모와 자신의 현실에 절망하는 딸이 있다.
영화 '인어공주'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울부짖던 딸이 엄마 아빠의 기억 어디쯤에서 겪는 판타지.
누구에게나 빛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가 내 맘속으로, 내 일상 속으로 잔잔히 스며드는 처음. 맞잡은 두손만으로 전기가 흐르던 설렘. 언제 손을 놓아야 할지 몰라 땀이 흥건한데도 손을 놓지 못했던 어느 밤길. 아쉽게도, 아름다운 것은 대부분 수명이 짧다.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돌아보니 혼자 뛰고 있고, 길을 벗어나 너무 멀리 와 있기도 하다. 때로는 계속 혼자 뛰어가기도 하고,되돌아가 머뭇머뭇 옛사람의 흔적을 살피다 길을 잃어 망연자실해하기도 한다. 현재의 모습만으로 그에게 또는 그녀에게 그런 순간이 없으리라고 단정짓기도하고, 가까운 세월에내가 어떠한 변화를 겪으리라고 예상치 못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대화 끝에 듣게 된내 엄마 아빠의 첫 만남 이야기와 신혼시절을 회고하던 엄마의 눈빛을 보고 잠시 놀랐던 것처럼. '그럼 웃겄지, 울겄어?' 하는 연순의 마지막 대사처럼. 생각지도 않게 힘이 되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처음으로, 엄마와 단둘이 손을 꼭 잡고 영화관을 찾았다. 나란히 서서 상영표를 보고 있자니, 오래 전 기억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재선이가 엄마보다 훨씬 커졌다고 활짝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셨을 때, 그래봤자 반에서 6번이라고, 엄마 유전자 때문이라고 뾰루퉁해져서는 엄마 손을 뿌리쳤던 기억.
넓디넓은 멀티 플렉스 극장 안의 수많은 커플중에서 우리 모녀의평균키가 제일 작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모를 동질감에 이제는 그저 웃음이 난다. 언젠가, 내게도 엄마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딸은 나보다 좀 더 클 수 있으리라. 내 키를 훌쩍 넘겼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 내 딸내미가 내 손을 뿌리친다면...한 대때려줘야겠다.
강재선(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