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빵 할머니와 ‘장수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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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빵 할머니와 ‘장수만세’
  • 장현주 편집위원
  • 승인 2010.10.20 13: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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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이야기] 일산좋은치과 장현주 원장

 

올해 칠순을 맞으셨으니 우리 어머니가 3기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신 게 벌써 10년 전 일인 셈이다. 그리고 개업초년생이었던 나는 이제 개업 10년을 넘긴 중견 치과의사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더니 그래서일까. 개업현장에선 10년 전 우리 어머니처럼 위암을 비롯한 각종 암 치료 병력을 가진 환자들과 고혈압 당뇨 관절염 골다공증 등 각종 성인병과 퇴행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빈번히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위암판정이 치과의사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내 자신에게는 하나의 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위암사건! 이후 나는 환자들의 병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병력조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누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 진료현장에서 얼마나 비중 있게 다뤄지느냐는 좀 다른 문제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초년 치과의사에게는 인상적인 의료사고라도 겪지 않는 이상 놀라우리만큼 무심해 지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환자들의 질병에 관심을 두다 보니 40대 환자들의 상당수, 50대 이상 환자들의 절대다수가 대부분 어딘가 전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0이 넘어가면 대부분의 노인환자들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기 십상이다. 자연스럽게 나이듦에 대해, 건강에 대해, 그리고 잘 사는 일과 잘 죽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올 초에 신환으로 내원하셨던 정○○ 할머니가 기억난다. 진료실로 안내되어 유니트체어에 앉으실 때까지 할머니는 여느 노인환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챠트에서 할머니의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허걱! 할머니는 우리치과에 내원한 역대 최고령환자였다. 스코어는 92. 몇 년 후면 거의 한세기를 사신 셈이 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연세만이 아니었다.

마침 옆자리에는 70대 할머님 한 분이 틀니 시술을 받고 계셨는데 사실 정○○ 할머니는 그분보다 더 정정해 보이셨다. 잡티가 많지 않은 고운 피부, 활달하고 또렷한 말투, 듬성한 앞니가 부끄러워 깨끗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말씀하시는 자태 등 누가 봐도 90대의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독립적이고 건강해 보이셨다.

허리가 좀 많이 굽으신 편이었지만 병력조사를 해보니 허리는 2년전에 있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이며 그 전까지는 꼿꼿하셨다고 한다. 별다른 질병도 없으셨다. 할머니는  부축도 받지 않고 70대 후배(^^:;)의 차를 얻어 타고 치과에 오셨다. 데스크 직원은 초진챠트를 작성하는 동안 한 번도 더듬지 않고 한 번에 주소를 불러주셨다고 놀라워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할머니께 여쭸다.

“정○○님, 정말 건강해 보이세요. 주민등록번호 알고 깜짝 놀랐네요. 건강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궁금하네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식들이 효도를 해서 그런 거 같아요. 큰애는 미국에 있어서 자주 못오지만 2주마다 꼬박꼬박 전화를 해주고 작은아들도 자주 찾아오고... 아침에 10시에 일어나면 행복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져요."

할머님을 모시고 오셨던 70대 후배 분은 이양반이 100억대 부자니 진료비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귀뜸해 주셨다.

흠 100억대 부자라니 한평생 부유하게 살아서 그늘이 없어 이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2년 전에 영감님이 세상을 뜨시고 지금은 혼자 기거하고 계시다고 한다. 자식들이 효도한다지만 90대 노구에 남편을 잃은 독거노인인 셈이다. 충분히 우울할 수 있는 조건인데 이 할머니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나중에 좀 친해진 후에는 손수 만든 빵을 선물하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빵을 만들어서 성당 신부님한테도 갖다드리고, 우체국에도 갖다 주고 그랬어요. 거기 아가씨들이 내 빵을 너무 좋아해. 나한테 빵 만드는 법 배우려고 우리 집에도 왔다가고 그랬어요. 나는 내 빵을 행복빵이라고 불러요. 계란도 듬뿍 넣고 재료 안 아끼고 만들어요."

할머님은 이후에도 종종 행복빵을 선물하시곤 했다. 할머님의 구강상태는 연세에 비해 양호하신 편이었다. 하악은 자연치가 상당수 남아있으셨고 나에게는 상악의 흔들리는 전치 2개를 빼고 총의치 시술을 받기 위해 내원하셨었다. 

아무리 건강하시다고 해도 90대 노인이니 혹여나 시술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외과적인 치료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할머니 역시 기대에 차서 상악의치가 완성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대합치였던 기존 하악 국소의치의 메탈프레임 적합도가 좋지는 않았지만 환자가 전혀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연세를 고려해서 재제작을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대에 차서 상악의치를 장착하시고 간 첫날, 할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음날 의치를 체크하고 전체 교합고경을 줄이기로 결정한 뒤 내원약속을 다시 잡았다. 그러나 예약당일. 결국 환자는 오지 않고 의치만 돌아오고 말았다. 단호한 어투의 편지와 함께. 이 틀니로는 씹을 수가 없으며 이 상태로는 도저히 쓸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환불을 해달라고. 치과에는 오지 않겠다고.

나는 할머님과의 좋았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고 단순한 상악의치 케이스를 내가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해서 기어이 의치를 고쳐놓고 환불도 해드렸다. 편지도 썼다.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 사용 안하셔도 좋지만 이왕에 할머님을 위해 맞춤으로 제작한 것이니 두어야 달리 쓸데도 없다. 다른데서 재제작을 하시게 되더라도 당장 임시틀니가 필요할 테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건강하시라고. 하지만 틀니는 다시 되돌아왔다. 열심히 진료해주신 것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도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틀니는 받지 않겠다는 요지의 편지도 함께였다.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이후 계속 우리치과에 내원하셨던 후배할머님은 일의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 할머니가 사람 좋은 거 같지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예요."  하긴 진료 중에 지나가듯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나는 동사무소를 왜 주민자치센터라고 이름을 바꿨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동사무소를 찾아가려다가 몇 번이나 헤맸는지 몰라요. 그래서 구청에다가도 항의하는 편지를 썼어요. 왜 멀쩡한 동사무소를 이름을 바꿔서 혼란을 주느냐구. 나는 하여간 지금 이 나이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가만히 못 있어요."

그 단호하고 분명한 성격,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할머니의 에너지가 건강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난 꽤 비싼 장수특강을 들은 셈이다. 워낙 할머니로부터 받은 좋은 기운이 많아서 이런저런 곡절에도 불구하고 원망은 들지 않는다. 한참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참 보기 좋게 나이 드신 어른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적인 생활을 못 하는걸 흔히 보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원망도 많아지고 고집도 세진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혼자 사는 노인이라면 우울증에 걸릴 법도 하다. 그러나 정○○할머니를 보면 베푸는 마음과 호기심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 틀니는 새로 하셨나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장현주 (일산좋은치과 원장, 건치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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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0-10-21 11:13:55
을 주는 글 이네요. 오래 전 아주 깔끔하게 늙으신 할머니 한 분이 췌어에 매달려 있는 크리넥스 티슈통에 덮개를 씌우라고 충고하셨는데 직원들 일손이 늘어날까봐 듣지 않았어요. 한 두번 얘기하시더니 변화가 없자 안 오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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