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생의 영화한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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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의 영화한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 2
  • 강재선
  • 승인 2004.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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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 가장 생각났던 건 내 친구들이었다. 도미노현상처럼 모두들 줄줄이 떠나고 난 황량한 30대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내 솔로부대 친구들. 소시적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학교를 떠도는 스캔들 정보를 교환하며 시시덕거리다가 자조와 자학이 묻어나는 시니컬한 대화로 끝을 맺곤 했는데, 돌솥, 절연체, 양은냄비가 그것이다.

각자의 연애 취향을 절묘하게 표현한 별명인데, 쿨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매사 발끈하는 필자는 후자다. 달궈진다면 가장 뜨겁지만, 문제는 달궈지기가 힘들다는 돌솥친구나, 어째 이성과의 감정소통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쿨한 절연체 친구에 비해, 짧기는 하나 순식간에 달아올라 나름대로 극적인 기쁨과 극적인 슬픔을 고루 겪으며 세상 모든 이들이 하는 연애와 가장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만남들을 가진 나, 양은냄비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맛난 안주거리였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했던 지난날의 연애사를 돌이켜보건대, 연애를 시작하기 전 밀고 당기는 바로 그 시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고백이 오고 가는 전율의 그 순간, 그것이 지나면 새콤달콤함은 조금씩 하향곡선을 긋곤 했다(똘똘한 사람들은 하향곡선을 다시 끌어올릴 묘안들을 잘도 찾는 것 같다).

연애란 인간관계의 절정이라, 한번 맛본 그 맛을 잊지 못해 밀고 당길 새로운 갈등을 필요로 하는데, 질투와 오해와 불신과 열등감 등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배부른 투정 외에, 보온이 되지 않는 애정에 당황하거나, 자신의 인생 노선과 상반되는 미래가 예상되는 등 실질적인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있겠다.

자, 그럼, 우아하지 못한 싱글들에게 강력한 감정이입을 선사했던 지난날의 브리짓은 어떠한가. 되는 일이 없지만 당당하고, 어수선했지만 발랄하고, 귀여운 솔로친구들의 지지를 받던 거침없는 말발의 그녀가 해피엔딩으로 달려간 후, 그녀에겐 어떤 변화가 생겼나.

자조적이었지만 현실을 직시했고, 날카롭고 직관적인 부분도 있었던 브리짓에게 남은 건 아쉽게도 질투와 열등감이다. 속편의 그녀는 뭇 여인네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에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 어이없는 바보짓으로 익숙한 웃음을 던져주고 여전히 푼수지만, 이미 그녀는 가시가 잘 발라진 운 좋은 여주인공이다.

엽기적이고 주책 맞게 평생을 살라는 건 브리짓에게 가혹한 형벌이겠지. 그렇다. 우리 절연체, 돌솥, 양은냄비 친구들이라고 좋은 날 오지 않는다면 섭섭하다. 하지만 아쉽다. 안정을 위해 대세를 택하는 이들 대부분의 알록달록한 색깔이 희미해지는 것이.

‘나 홀로’가 꼭 나쁘지는 않다는 것, ‘단 둘이’가 꼭 좋지는 않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는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솔로부대들은 오늘도 연말연시의 밤거리를 헤맬 것이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거리를 메울 것이다. 어쨌든, 멀리 떨어져 있는 돌솥친구와 절연체친구에게 기분 좋은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강재선(인천 남동구 유명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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