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셈,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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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셈,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 편집국
  • 승인 2004.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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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온 ‘의사’와의 서울 동행기

지난 7일 열린  '이라크전쟁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라크 출신 의사 하이셈박사와 동행하며, 가이드 역할을 한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외협력국 박용 국장(한의사)이 그와의 동행기를 써 본 보에 기고해 왔다.기고문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급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전범기소민중재판의 증인으로 참석차 방한한 이라크인 의사 2인 중 한 명과 반나절만 동해해 줄 수 없는 가하고...

하루에 반나절이나 병원을 비워야 한다는 부담감과 영어를 놓은지 오래되었다는 불안감으로 쉽게 승낙을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과연 내가 이라크인을 만나서 무슨 애기를 할 수 있을까? 괜한 상처만 끄집어내는 게 아닐까? 아니, 나 스스로가 이라크의 현실과 맞닿기를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망설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부딪혀 보자. 내 평생 이라크에 가볼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데, 한번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또 들어도 보자 하는 결심을 세웠고, 그래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12월 3일 금요일 오후 서울역으로.

하이셈은 이라크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반전운동가 이동화씨와 함께 있었다. 같이 있기로 했던 오수현 작가는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웠고, 이동화씨 또한 다른 일로 떠나야 한다고 했다. 전날 이라크파병연장 반대 시위로 이 모임과 미팅을 조정해주던 ‘미류’라는 의사 선생님이 경찰서에 수감되는 바람에 여러 혼선이 있었고, 결국은 나만 남아 동행하는 걸로 결정이 났다.

사람 좋은 인상으로 먼저 웃으며 인사 하는 하이셈. 날이 추웠지만 얇은 가죽점퍼 한 장을 걸친 하이셈은 피로한 기색과는 달리 뭔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후에 들은 애기지만, 11월 18일 경 한국에 온 그는 지난 2주간 하루 세 시간 수면으로, 10개가 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라크에 관한 증언을 하였으며, 당일 오후가 처음으로 갖게 되는 관광의 시간이었다.

그는 사진찍기를 좋아했으며, 역사와 의미가 있는 공간을 좋아했다. 서울에 산 지 5년 차. 내가 다녔던 곳이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도 나의 관심사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내가 평소에 즐겨 다니던 곳이었다. ‘서울타워’와 ‘고궁’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오후 7시에 보건의료연합 사무실 송년회 미팅이 있으므로 남은 시간은 4시간이 조금 모자란다.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서울타워’를 시발로 하는 것이리라.

곧장 택시를 타고 남산의 정상으로 올랐다. 서울의 남과 북을 보여주며 특징적인 부분을 설명했고, 서울타워 내부에 있는 옛 서울과 현재의 서울(이라고 해봐야 1980년대의 사진인)을 비교해 놓은 사진을 함께 둘러보고, 세계의 높은 타워, 빌딩들의 사진들도 우리 대화의 한 부분이었다.

이라크는 잘사는 나라였다

부모님이 공부하던 중에,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세살까지 그곳에서 자랐고 이라크로 돌아왔다. 다시 의대를 졸업하고, 런던에서 재차 공부를 하고,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10일 전 이라크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외부 경력과 여러 곳을 여행한 경험이 그를 밝은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그는 말했다. 이라크는 아주 잘 사는 나라라고, 아니 나라였다고. 이라크 내에서 휘발유 1L가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3cent란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30원정도이다. 전쟁 전은 이보다 낮았고, 전쟁 후 구하기가 힘들 뿐이지 여전히 가격은 30원 정도란다. 물론 사담후세인이 많은 돈을 빼 돌리기는 했지만, 교육은 무료였으며, 기름 값이 이 정도니 다른 물가는 말하지 않아도 추측 가능하리라.

그는 당당했다. 사실 그가 당당하지 말라고, 또는 당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나에게는 전혀 없는 데도, 나는 그의 당담함이 조금은 생소했다.

서울타워를 내려와 가까운 경복궁을 2차 장소로 잡았는데, 택시가 보이질 않는다. 콜택시 또한 부름에 응하지 않고, 그러던 차 서울 시티투어버스가 도착했다. 연신 서울의 풍경을 담던 그가 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게 직접적으로 물어왔다.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 게 있냐고?

사실 난 그와 밝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깊은 이야기를 영어로 대화할 실력도 되지 않았지만, 사람과 첫 만남에서 좋은 이야기가 우선이다 싶기도 하고, 그의 힘든 시간들을 좀 잊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싶기도 했고,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라크에 대해서 잘 몰랐다. 내가 안다고 한들 그에게 어떤 위로를 해줄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그 아픔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꿋꿋했다. 현재의 이라크는 최악이라고. 작년 보건의료연합 진료팀이 봤던(전기는 끊기고, 수도와 하수도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각종 수질병들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총격으로 죽어나가고) 상황보다 더 악화되었단다.

그래서 용기 내어 물었다. 전범기소인 운동에 대해 글을 올렸을 때, 반론이 있었던, 정말 이라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군의 주둔에 대해서, 사담후세인과 어떤 비교를 하고 있는지.

그는 단호했다. 사담 후세인을 정말이지 싫어하지만 또 원치 않지만, 지금은 사담 후세인을 원하기도 한다고, 아니 그 시절이 차라리 낫다 싶기도 하다고. 왜냐면 그때도 사담이 수많은 국민들을 살해하고 감시하고(한국 70년 전후 독재시절보다 더 삼엄하게) 국부를 빼돌렸지만, 지금은 미국과 영국이 그러고 있으므로. 미국은 지금도 거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다고. 예로 팔루자에서는 2주간 6천명이 살해되었단다. 남녀노소 포함하여.

하이셈은 한국에 나와 그런 상황을 들려주고 증언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라크 내에서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자료를 모으고 있지는 않을까? 어떤 독립영화감독이 이걸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고 있지 않을까?(하이셈과 나는 모두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나의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나의 환상이었다. 이라크에서는 미군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떤 기록도 참관도 통과되지 않는다. 온통 통제이며 미군이 허락하는 선에서만 기사가 공개된다. 우리가 접하는 기사와 동영상이란 그렇게 걸러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우린 미군이 어떤 단체의 자살 테러, 폭탄 테러에 의해 몇 명이 죽었나 만 주로 들을 수 있다. 이라크 사람들이 오폭에 의해 또는 거리에서 총살에 의해, 총질에 의해 몇 명이 죽거나 다치는지는 알 수 없다. 알더라도 단신이다. 단지 몇 명이라고. 그런데 몇 명이 아니었다. 수 백 명이고, 수 천 명이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이셈은 나에게 알려주고 또 알려주고 싶어 했다. 하루 세 시간 수면으로 버티면서 일을 수행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는 힘들지만, 그것이 한국에 온 자기의 목적이라고 했다. 강인하다, 하이셈은. 그러나 이야기를 마친 하이셈은 다시 밝은 얼굴로 사진을 찍었고, 자기는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고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을 덧붙인다.

역사와 문화, 타인에 대한 이해를 중요시한다는 하이셈에게 나의 이라크 역사에 대한 무지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나서 다시 이라크 왕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라크에도 왕정이 있었으나 1950년대에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무너졌고, 망명을 갔거나 이라크에 생존한단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일어날 기세란다. 미군의 침입 후 다시 이라크 왕정을 수립하고자.

웃는 하이셈. 그 모든 혼란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이란다. 미국이 영국이, 그리고 한국이 할 일이 아니란다.

겨울임을 잊었다. 모든 고궁들의 입장시간이 4시에 끝나고, 덕수궁만 4시 반까지 입장을 받는다.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택시를 타고 덕수궁 앞에 내렸다. 어찌 보면 외세의 흔적을 가장 많이 담은 궁이 아닌가 싶다. 궁궐의 문마저 제 위치를 잃은 지 오래 이고, 궁의 건물은 몇 채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 사이로 서양식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 한국 근대사의 상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으리라. 또한 앞으로는 시청과 시청광장, 주위로는 비싼 호텔들과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고.

하이셈 또한 옛 건물과 현대 건물이 나란히 있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듯, 요리 조리 사진을 찍어보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시청 앞에 놓인 트리를 배경으로도 사진을 찍고. 세종대왕 동상에서도 포즈를 취하고(왜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을까?). 세종 때 발명한 물시계 앞에서 대단함을 비치는 데, 에이, 이라크의 역사, 중동의 역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데 하는 생각에 길게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옮긴다.

함무라비 법전은 영국으로

역시나 이라크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는 하이셈은 다시 열변이다. 그러나 또 다시 가슴이 아프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바그다드 박물관이 초토화되고 약탈되고. 기억나는지,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석상이 도난당한 것을. 지금 그것이 영국에 있단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지금 영국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데, 하이셈은 다시 미국을 성토한다. 미국의 허락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고. 모든 거리를 장악하고 통제하고 검문하는 미국의 허락 없이 어떻게 그 큰 유물들이 유유히 사라지고, 그리고 해외로까지 나갈 수 있냐며. 파괴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면서...

전쟁의 이면을 다시금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언제나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냐는 우스운 질문에, 하이셈은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덕수궁을 관람하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는 시간 다시 무얼 할까? 다행히 하이셈이 걷는 것을 좋아한단다. 찬찬히 둘러보고 살펴보고 하는 것을. 정동 길을 걷기로 했다. 이름난 산책로이지만 저녁노을을 받는 낙엽 떨어진 길이라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예전처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썩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요모조모 설명할 것이 많았다. 왜 덕수궁 길을 걸으면 연인이 헤어지는 지. 새로 지은 서울미술관도 보여주고, 나도 처음 들어가 보는 정동극장도 둘러보고, 이름난 '난타'공연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뼈대만 겨우 남아있는 러시아 영사관 건물에서 사진도 찍고.

그러나 아픈 생채기는 다시 드러난다. 덕수궁 뒷길을 의경이 줄을 지어 막고 있다. 미군과 관련된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어디든 미군과 관련된 곳은 그렇게 의경들이 둘러서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미국은.

이라크도 마찬가지란다. 한국에 오기 전 반전, 반미 시위로 하이셈도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다. 다행히도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국시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사히 풀려났고 한국에도 올 수 있었단다. 지금 바그다드 공항도 폐쇄상태이며, 요르단과 맞닿아 있는 국경선도 막힌다 하니 이라크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확실하지 않단다. 안되면 시리아를 거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여하튼 그는 이라크로 돌아갈 것이다.

서너 시간을 걷다보니 배가 고프다. 하이셈에게 넌지시 한국의 음식에 대해 물어봤다. 아마 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지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첫 인상은 어땠어요? 음식은 어땠어요? 하이셈이 웃으며 솔직히 답할까 하고 되묻는다. 솔직히 답하라고 했더니, 맛이 없단다. 모슬림이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외국에 나가서는 어떤 육고기도 먹지 않고 생선만 먹을 수 있는데 생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주로 채소만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채소는 맛이 없단다. 왜 없을까? 훗. 소금을 별로 치지 않아서. 이라크 음식은 무조건 맛이란다. 건강은 나중이고. 그래서 소금을 많이 쳐 먹는단다, 맛이 있으므로. 어, 그건 몸에 좋지 않은데 라고 물으니 하이셈 왈 ‘그러는 당신은 의사인데 왜 담배를 피는가?’ 하하, 하이셈 당신도 담배 피잖아. 서로 웃고 그냥 넘긴다.

아직은 배가 덜 고프다는 하이셈을 데리고 마지막 경로인 경희궁을 향한다. '서궁'이라고도 불리는, 창덕궁에 버금가는 궁이었으나 완전히 해체되고, 요즘에 겨우 다시 짓기 시작했지만 서울시에서 돈이 없다고 재건을 포기한. 그럼 돈은 누가 가지고 있냐고 하이셈이 묻는다. ‘모르지 권력 있는 자들이 몽땅 가지고 있는지.’

쓸쓸한 경희궁의 밤에 반가운 야외 전시회가 있었다. 실크로드 사진전이었는데, 이라크 바그다드의 사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경희궁은 제쳐두고 하이셈은 사진을 설명하기 바쁘다. 바그다드의 큰 박물관과, 전통가옥, 전쟁 속에서도 밝게 커 나가는 이라크 아이들. 열에 들떴던 하이셈이 잠시 숙연해 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 말없이 하이셈이 혼자 걷게 내버려둔다.

이라크는 이라크인에게

도저히 배고픔을 참을 수 없다. 아직 다음 약속시간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고른다. 김밥도 좋아한다는 하이셈. 그러나 나는 햄버거가 먹고 싶다. 미국의 상징이라는 햄버거를 하이셈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본다. '아주 맛있단다'. 물론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고. 영국에서 공부할 때 아르바이트로 맥도날드에서 삼개월간 일한 적도 있다고 했다. 맥도날드에 다행히 '휘시버거(fish burger)'가 있다. 역시 맛있다. 그런데 왜 맛난 건 대부분 毒을 품고 있을까?

하이셈도 배가 고팠나 보다. 버거와 감자튀김까지 모두 먹고 조금만 더 걸어볼까, 그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루미나리에'라는 축제가 있다던데. 오! 환상적인 빛이다. 거리에 관문처럼 하얀 기둥들을 세워 놓고 색색의 전구로 모양을 꾸며 놓았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하이셈도 다시 크리스마스 기분이 난 듯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그런데 전구 불빛의 문양이 꼭 아랍풍이다. 하이셈도 동의한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고요한 경복궁 앞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하이셈, 내일 시간되면 '경복궁' 꼭 둘러 보세요라는 당부를 하고, 마침내 보건의료연합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막 식사를 하는 중이다. 사무실 도착까지가 나의 임무이고, 이후로 친구들과 송년회 약속이 있는 나였지만, 자꾸 변혜진 간사가 잡는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이셈을 통역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아서라고.

어, 다들 왜 그러시나? 대충의 영어는 다 알아들으실 분들이 너무 긴장하시는 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좀 더 남게 되었고, 우리 둘은 배가 불러 간단히 샐러드만 집어먹고 행사 진행을 지켜본다.

순서가 바뀌어 하이셈이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인사말만 통역해주면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자리에 앉은 하이셈, 오! 이런 이라크에 대해 쭈욱 설명을 하는 게 아닌가? 이런 통역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데.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어떻게 단어 하나라도 더 들을 량으로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다. 다행이 흘린 단어들은 우석균 선생이 주워 주신다.

하이셈은 그 자리에서도 단호했다. 미국을 비롯해 한국군이 이라크에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마지막 구호로 그 자리를 정리했다. ‘이라크는 이라크인에게!’

그는 광주를 기억했다. 어느 도시보다 광주가 가장 사람스럽다고. 그리고 말했다. 광주는 세계 어디에나 있고, 그리고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팔루자’ 또한 또 다른 ‘광주’라고.

부모의 도리는 자식을 장성시켜 결혼까지 시키는 것이라는 이라크의 풍습.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결혼을 하는 것인데, 자기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래서 부모님께 죄송하다며 웃는 하이셈.

여전히 전쟁의 포화에서도 역사와 문화를 즐기고, 사진기 눌러대는 것을 좋아하는 하이셈. 그 열악한 시설에서도 촛불하나 켜 놓고 환자를 기꺼이 보는 그. 머나먼 길을 돌아 이 조그만 한국 땅까지 건너와 정열을 불사르는 그. 그에게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며, 형제가 있고, 여자친구가 있다.

그렇게 영화 제목처럼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그 삶을 얼마나 진실되고 성실하게 사느냐는 우리 서로의 손길이 닿는 그 곳에 있지 않을 까 싶다.

박용(한의사.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외협력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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