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밀레와 고흐,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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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밀레와 고흐,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만나다
  • 김기현
  • 승인 2010.12.27 12: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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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원장의 유럽여행기

 

우리를 태운 밴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이 되어버린 베르사이유 궁전을 뒤로 하고 파리 남쪽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노랗게 익어가는 밀이 끝없이 펼쳐진 프랑스 시골풍경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뜨거운 태양아래 쏟아지는 햇빛, 그 양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만 빼고는.....

달리는 차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 속에서 곧 만나게 될 밀레의 생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술에 찌든 듯한 퀭한 눈, 그러나 캔버스 앞에만 서면 꼿꼿이 등을 세운 채 눈빛을 이글거리는 가난한 천재 화가의 전형이 나의 머릿속에 오버랩 되어 갔다.

그러나 실제 밀레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은 잘 절제된 가운데 규칙적이고 모범적이었다고 하니, 머릿속에 각인된 선입견이라는 것이 틀릴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프랑스 파리 외곽 남부의 ‘바르비죵’.

▲바르비죵 마을 입구에 있는 만종
이 작은 시골 마을 입구의 큰 간판에는 밀레의 대표작 ‘만종’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간판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만종을 그린 밀레의 캔버스가 놓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 없었던 논두렁(?)이었다.

‘바르비죵’ 마을은 느린 걸음으로 한바퀴를 돌아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고, 슬리퍼를 신고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었다. 간간히 우리를 포함한 거리의 몇몇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사진기를 들이대며 셔터 누르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이 그래도 관광지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전날 갔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아쉽게도 만종을 보지 못했다.

해외 전시 때문에 잠시 외출 중 이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고 하니, 만종을 위해 오르세로 가는 일은 사전에 확인하지 않으면 위험한 도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시여부는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할 수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
오르세에서 들었던 ‘밀레’와 ‘밀레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바르비죵’을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일정상 모네의 작업실이 있었던 ‘지베르니’행(行)과의 선택에서 갈등의 여지없이 손쉬운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밀레 이전의 화풍은 주로 신화의 내용을 담거나(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귀족들의 초상화나 여인들의 누드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실제 풍경(그것도 시골의 풍경)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천박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직접 자연으로 캔버스를 들고 나가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하여 당시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밀레는 파리의 아틀리에에 틀어박혀서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렸던 기존의 화단과 화풍을 거부하고 직접 농촌으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낸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밀레의 이러한 뜻에 같이하는 많은 화가들이 그의 뒤를 따라 ‘퐁텐블루’라는 지역의 조그만 마을인 ‘바르비죵’에 모이게 되면서 하나의 큰 화단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가르켜 ‘퐁텐블루파’, 또는 ‘바르비죵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르비죵파’는 이후 ‘인상파’ 화가들을 낳게 된 모태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니, 미술사에서 밀레가 차지하는 지위가 어느 정도 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으로 이러한 작품을 화단에 발표했을 때 기존의 화단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농촌생활의 여유로움이나 목가적인 내용보다는 어둡고 침울한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작품의 색채가 어두운 경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 또한 (실제로 이것은 램브란트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비판을 낳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삭줍는 여인들’이란 작품을 보면 먹을 것이 부족해 이삭이라도 주우려는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그린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종’의 경우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수확 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갓난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부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그 부부 사이에 죽은 아이의 관을 그렸는데, 심의에 걸릴 것을 염려한 친구가 그 관을 지우라고 하여 거기에 감자바구니를 덧칠해 그렸다고 한다.

▲바르비죵 식당의 간판
이것은 이후 ‘살바도르 달리’라는 초현실주의 화가가 만종을 보며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X-ray를 이용한 그림 투시를 줄기차게 요청하였고 그에 따른 결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달리는 자신이 해석한 ‘만종’을 같은 이름의 작품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밀레의 그림에서는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농촌 사람들과 풍경을 주제로 해서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나 혹자들이 말한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등의 사회성 짙은 활동을 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밀레의 그림은 농부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색채나 화법, 구도 등으로 격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 차분하고 경건하게 바라보는 감정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자연주의 화가의 선구자라고 불렀던 것은 아주 적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서너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머물렀던 ‘바르비죵’에서의 느낌은 ‘아! 이런 곳이었기 때문에 밀레의 그런 그림이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쏟아지는 햇빛, 작은 시골길, 소박한 밀레의 아틀리에, 그리고 마을 담벼락이며 가게의 간판이며 길거리 등에 수없이 새겨진 ‘만종’을 보면서, 작고 소박한 것은 항상 위대한 것을 품고 있다는 말, ‘밀레’를 품고 있었던 ‘바르비죵’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밀레가 실제로 기거했던 집, 즉 그의 작은 아틀리에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화가 고흐를 만난다. 며칠 후 예정에 없었던 고흐를 만나게 된 것도 이번 여행에서 커다란 수확중의 하나였다.

▲밀레의 아틀리에 입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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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2010-12-30 10:06:40
약간 지루한 곳일 수도 있어요. 볼게 없으니...같이 갔던 조카들하고 아들놈인데 큰조카는 중학생인데 미술, 음악 이런걸 좋아해서 재미있어 하고, 작은조카와 아들놈은 전혀 관심이 없었죠..

전민용 2010-12-29 16:27:19
좋은 글과 사진 감사^^ 그런데 애들은 지루한 것 같기도 하고 몸을 비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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