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밀레와 고흐,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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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밀레와 고흐,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만나다
  • 김기현
  • 승인 2011.01.03 12:2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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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원장의 유럽여행기

(上편에 이어)

제네바에서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까지 이어진 고속도로에는 유럽 각국의 차들로 가득 차 있다. 여름 휴가철의 고속도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느릿느릿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들이 뿜어내는 더운 열기만 받아내고 있었다.

타던 차를 폐차하러 갔다가, 다른 사람이 폐차하러 온 차를 넘겨달라고 해서 소유하게 된 매형의 독일 명차 아우디는 이런 더위에도 꿈쩍없이 잘 달리고 있다. 에어컨을 풀로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내는 이 녀석을 향해 뒷좌석에 앉은 아들 녀석이 ‘이 차 썩었네, 썩었어.’를 연발하지만, 이 독일 명차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남프랑스 한국인 민박집
5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남부 프랑스의 최대 관광도시 아비뇽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

말이 민박집이지 우리가 보기에는 거대한 저택이었고, 여기저기 객실로 쓰이는 방들은 프랑스 풍으로 정말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다.

‘에어프랑스’ 최초의 한국인 직원이었던 이 집의 여주인은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두었고, 20여년이 넘어선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 남부로 이사 온 후에도 일주일에 2번은 파리의 에어프랑스 본사에 TGV로 출근하는 등, 세계적인 항공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그녀의 자기자랑이 전혀 얄밉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더 자랑스러워 질 정도로 멋진 인상을 남겨준 분이었다.

제네바에서 갈까 말까 망설였던 여행이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역시나 하는 후회로 고조되었다가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아비뇽 주위의 관광지로부터 북쪽의 제네바를 향해 올라가면서 남부 프랑스의 여러 프로방스를 가기로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거대한 3층 아치교인 ‘퐁 뒤 가르’를 들른 후 맨 처음 찾은 곳은 남부 프랑스의 프랑방스, 바로 ‘아를(Arles)’이었다.

▲퐁 뒤 가르(3층 아치교)에서 환서와 조카들
인구 5만이 산다는 조그만 도시 아를은 관광객만 한해 무려 200만이라고 하니, 도대체 이 작은 도시를 그 수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빈센트 반 고흐’,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르세 박물관 입구에는 이곳이 오르세임을 알리는 큰 간판이 서 있고, 거기에는 고흐가 그린 자화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 ‘오르세’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고흐’임을 보여주는 박물관 측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또 한 번 아쉽게도 나는 오르세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동안 걸어 다닌 탓에 아들 녀석의 발가락에 염증이 생겨,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로비에 있는 의자에서 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고흐 뿐만 아니라 마네, 모네, 세잔 같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죄다 못 보았으니 약간 아쉬운 맘이 들긴 하였으나, ‘책속에서 이미 다 본 것들이고, 실제 작품을 본다고 해서 내가 뭘 알까?’ 싶어 크게 개의치는 않았었다. 그런데 다음날 ‘바르비죵’에 있는 밀레의 아틀리에에서 고흐가 가장 존경한 화가였던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그의 습작들을 보고서 아쉬움이 싹텄고, 남부 프랑스 여행 전에 고흐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서 아쉬움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고흐에 환호할까?

단지 그의 그림이 독창적이고 뛰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화가로서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경외감, 동정심 이런 것들 때문일까?

27세의 늦은 나이에 시작한 화가로서의 삶, 불우한 그의 환경과 계속된 사랑의 실패로 피폐해져가는 그의 영혼에 대한 동정심, 그런 와중에서도 10년이라는 화가로서의 짧은 삶 동안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림에 몰두했던 그의 정열에 대한 경외감, 더불어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천재성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불굴의 노력에 대한 존경심 등이 복합되어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아를의 곳곳
아를에 머문 1년 동안 그는 200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카페’, ‘도개교’, ‘노란집’, ‘아를 요양원의 정원’, ‘꽃병에 꽂힌 해바라기 열네송이’, ‘고흐의 방’ 등등......

아를에서의 그의 작품은 파리에서와는 또 다른 강렬한 남부 프랑스의 햇빛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고흐하면 떠오른 색, 즉 ‘고흐의 색’인 ‘노란색’은 바로 ‘아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역사적인 고갱과의 만남도 아를에서였고, 화가 공동체를 위한 그의 사회적 노력도 아를에서였지만, 결국 그의 정신세계가 급격히 무너져 내려 죽음에 이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곳 또한 이곳 아를에서였다. 아를은 그의 영욕을 모두 담고 있는 곳이었고, 따라서 그의 정신세계가 가장 많이 녹아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졌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잠시 요양했던 아를의 병원은 이제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도개교, 밤의 카페 등 그가 그렸던 아를의 곳곳은 지금까지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아를’은 과연 ‘고흐의 도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를’에서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이 있었던 바로 옆 ‘생 레미 드 프로방스’로 이동하던 중 차안으로 쏟아지는 남부 프랑스의 햇빛은 얼굴을 제대로 들기 힘들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 햇빛을 보면서 불현듯 불우한 환경을 딛고서 화가로 성공하고자 했으나 연약한 내면만을 드러낸 채 무너져 내린 ‘가장 인간적인 화가 고흐’가 발하는 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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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2011-01-03 17:12:04
꼭 한번쯤 가보면 좋을 듯 싶더군요..독특한 느낌과 아우라가 전해지는 곳이었어요..아를 뿐만아니라 생레미드 프로방스, 액상 프로방스도 좋았고, 아비뇽같은 큰 도시도 제법 운치가 있어 좋더군요.. 다시한번 아를을 가게 된다면 고흐가 그렸던 아를의 곳곳을 다 따라가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전민용 2011-01-03 16:59:22
부럽다. 글도 잘 쓰고 여행도 제대로 하고^^ 한 여름인 것 같은데 더위에 조금 고생은 했을 듯... 언제 술 한잔 하며 얘기 좀 들읍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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