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인물] 서울 길 끊어버린 은자(隱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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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인물] 서울 길 끊어버린 은자(隱者)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5.01.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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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재형 선배님, 영원히 안녕 국가보안법이여,,,

"인간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용서하여도, 재산을 빼앗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한 이 말처럼 인간의 돈에 대한 집착을 적확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

혁명의 시절 흔히 부르짖는 구호가 있다. "힘 있은 사람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조국에 봉사하자"는 것이다. 혁명의 대열에서 지식으로 비장한 각오를 부르짖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온몸을 불사르듯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돈으로 혁명의 대열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총칼로 싸운 독립군보다 그들에게 군자금을 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 한치 앞의 죽음을 맞고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다
1938년 태어난 이재형은 부잣집 맏아들로 영천에서 자랐다. 그때는 술도가(막걸리 양조장) 하나만 가졌어도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런데 그의 집은 대구 경북에서 가장 큰 술도가를 포함해 3개나 운영했다. 게다가 과수원 수만 평에다 광산으로 개발한 땅이 수십만 평이나 되었다.

이재형은 1958년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를 나왔다. 1960년 경북대학생으로 4·19 민주혁명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4·19 민주혁명 후 혁신 정당에 참여하여 2대 악법(국보법, 집시법) 반대 투쟁에 뛰어들었다. 1964년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경제학과에 학사편입해, 1965년 굴욕적인 한일 수교회담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1967년 졸업 후에도 민주화 열정은 식히지 않았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고, 1972년 경북대학교 '정진희 필화사건'으로 얼마동안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재형은 60·70년대 운동 대열의 중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술도가 3개와 많은 땅을 처분했다. 동료나 후배들이 돈을 요구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4년 4월 유신정권은 대구 경북 민주인사들에게 발악적인 사건을 저질렀다. 그것은 '인혁당 재건 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간첩조작 사건이었다. 이재형은 백일이 갓 지난 둘째 아들과 노모를 남겨두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그의 실제 죄목은 운동 자금을 너무 많이 대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제발 재판 받을 때까지 살아남아 가족들의 얼굴을 한번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했다.

1975년 4월 8일, 8명( 이수병,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은 사형선고를 확정 받았다. 4월 9일 오전, 박정희는 선고 20시간만에 그들을 사형 시켰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세계적인 망신이었다. 이재형은 징역 20년을 받았다.

1982년 8년을 복역하고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동안 60·70년대 쟁쟁했던 수많은 동지들이 서울로 달려가 권력에 빌붙었다. 그는 서울 길을 끊어버리고 숨은 이(隱者)가 되었다.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입신과 영욕을 버렸지만 마음속 열망마저 놓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고문과 감옥 생활의 후유증에 몹시 시달려야 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가냘픈 몸매는 더욱 여위어갔다. 전두환의 폭정과 87년 대선 실패는 고문의 아픔보다 더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수원 한켠 집에서 들이키는 소주였다.

만신창이의 몸으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아직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는 욕망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후배를 격려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95년 대구 남구청장 선거 내내 과수원 일을 팽개치고 혼자서 남구 지역 골목골목을 누볐다.

▲ 지난 11월 23일 그가 사랑했던 후배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이 되어버렸다. 이재용 선생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긴 수염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속삭이는 '이재용은 좋은 사람'을 누가 감히 의심하겠는가? 그가 이렇게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물론 상당액의 선거 후원금도 기꺼이 내놓았다. 90년대 지역에서 그가 이런 일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돈을 움켜쥐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그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재형은 치과의사로 사회 운동하는 이재용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술을 끊을 수 없었던 야윈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신문과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문에서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을 보면 전화로 후배들과 대화했다. 쉬어진 목소리로 겨우 겨우 힘들게 하시는 말씀은 알아듣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전화 대화는 선문답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기력이 다하고 병든 젊은 노인은 아내에게 "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민주와 통일된 세상을 너무 욕심냈어. 그게 병이 되었나 봐"하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지난 10월말 심한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던 젊은 노인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후배 함종호가 의사의 최종 진단을 눈물로 전하자, '인간은 죽어야 돼, 그렇지 않다면 지구는 폭발할거야'라고 의연히 받아 넘겼다.

12월 21일 동짓날 오후 7시, 침대에 같이 누워있던 아내에게 윗몸을 일으켜 세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아내의 손을 갑자기 힘껏 잡고서는 아내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빈소에는 많은 화환이 즐비했다. '복지부 장관 김근태', '열린 우리당 의장 이부영'이 적힌 화환이 영정 좌우에 놓였다. 이부영은 감방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많은 이들이 찾아 왔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 여사가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 유인태·장영달·이철·이강철 같은 이들은 인혁당 사건과 함께 엮였던 민청학련 관련자들이다. 모두들 서울 길 달려가 영욕을 누리고 있는 후배들이다.

12월 24일 흐린 하늘에서 간간이 눈발이 내렸다. 고귀한 정신을 담았던 하지만 국가보안법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이 화장장 화로에 들어가 한줌의 재로 변하는 데 50분이 채 안됐다. 납골을 30년 전 먼저 간 인혁당 동지들이 잠들고 있는 현대공원묘지에 모셨다. 아흔이 넘은 노모는 영천 과수원집에서 병원간 아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2004년에 보안법이 폐지되면 나를 과분하게 대해주신 이재형 선배에게 <안녕 이재형 선배님, 영원히 안녕 보안법이여>를 바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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