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험악한 세상으로 내려오시라고..
상태바
이제 그만 험악한 세상으로 내려오시라고..
  • 전양호
  • 승인 2011.01.20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료실 이야기]강남인치과 전양호 원장

 

몇 년 전 건치에서 비전향 장기수분들에 대한 무료치과진료를 진행한 적이 있다.
사업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아서 어떤 방식으로 사업이 진행되고, 재정적인 부분이 어찌 처리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제발 선생님 이번 한번만 부탁드릴게요'라는 건치 상근자의 애절한 전화에 장기수 한분을 덜컥 맡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일처리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얼마나 급했으면 이러나 싶은 마음에...

처음 내원 당시 이미 다른 건치 회원 분 치과에서 상악에 부분틀니를 제작하셨고 오른쪽 하악 구치부에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대구치 1개가 결손되어 있고 지대치 치수의 괴사가 진행되고 있어, 신경치료 후 포스트 및 브릿지로 치료를 완료하였다.

이후 내원하실 때마다 하시는 90도 인사와 명절 때 가끔 들고 오시는 1000ml짜리 대자 양주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 챙기면서 정기검사와 관리를 진행하였다. 상악의 틀니 상태도 좋지 않고 여기저기 자잘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비용에 대한 문제도 있고 해서 어찌어찌해가면서 몇 년을 버텨냈다.

숱하게 있었을 회유와 고문을 이겨내려 했던 지난날의 흔적인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현재의 힘겨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든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합력이 너무 센 것이 문제였다. 지대치를 포함한 상악전치부의 마모와 파절이 심각한 수준까지 도달해 상악 틀니의 재제작을 피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동안 거의 무상으로 치과진료를 받아오시던 분께 이제는 비용을 지불하셔야 한다는, 그것도 그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수 있는 비용을 지불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애초에 책임의 범위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애매함으로 일처리를 한 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난감해하는 그 분의 눈길을 피해가면서, 얼마얼마의 진료비가 나오는 데 어느 정도의 할인을 해서 얼마얼마까지 해 드리겠다는 말씀을 꿋꿋이 해나갔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할인을 해 주는 것이고, 더 이상은 힘들다는 사족을 덧붙이면서...

며칠 뒤 다시 내원을 하셨다.
'원장님, 제가 ◯◯원은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원에 좀 해 주십시오'
그 분에게는 큰 돈이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큰 돈이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금액이 정말 많이 할인이 된 금액이고, 지금까지 당신께 정말 많은 것을 해 드렸지만 더 이상은 힘들다는 입바른 말로 그 분을 굴복시켰다.

그 동안의 유대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 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약간의 존경심과 마음의 빚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의 경제적 손해는 감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 나는 그 분을 끌어내리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이상 그 곳에 있지 말고 내려오시라고, 계속 꼿꼿이 서 있지 말고 이 험악한 세상으로 내려오시라고...

확실한 건 이제 더 이상 그 분에게 90도 인사와 1000ml짜리 대자 양주를 넙죽넙죽 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전양호(본지 편집위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경지부 틔움과 키움 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