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예정된 비극을 종결시키기 위해
상태바
[논설] 예정된 비극을 종결시키기 위해
  • 박덕영
  • 승인 2011.04.11 10:11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재들이 모여 있다는 KAIST에서 학생 교수 할 것 없이 죽음의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가공할 만큼 높지만, 그런 높은 자살율 속에서도 공부 잘하는 또는 부유한 사람의 자살은 의아해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공부를 잘하거나 부유한 사람의 자살이 의아하지 않은 세상이 될 때 비로소 이러한 비극이 멈춰질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공부나 부가 행복의 중요조건이 아님을 모두가 알 때, 비로소 이러한 자살이 의아하지 않을 터이므로.

연이은 학생들의 자살에 여론은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초점의 화두에 ‘징벌적 등록금제도’가 있는 듯 하다. 이미 목숨을 끊은 학생들에게 그 연유를 들을 바 없지만, 그들의 죽음이 돈이나 영어강의의 답답함에 있었겠는가? 압박을 가한 주체로 지목되는 총장을 희생양이라고 논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겠지만, 여론은 희생양을 찾고 있는 듯 하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면서,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낙인찍고 그 사람을 제거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듯 하다. 근본적 원인을 고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서남표 총장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고 이 비극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극의 뿌리는 우리 모두의 비뚤어진 행복철학에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쟁에 내어 몰리는 아이들. 이는 아이들이 선택한 길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 길이다.  부모는 사회가 그러하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것이지만, 그 사회를 만드는 것이 부모이다.

공부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공부는 잘하면 좋은 것이지 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인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를 가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는 위협과 압박을 강요받아온 학생이, 인생의 의미와 공부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될 당황과 허무.  누군가에게 뒤졌다고 느끼는 순간 작동되도록 장착되어 있는 20여년에 걸쳐 시한폭탄같이 세뇌된 공포와 위협의 논리가 이들을 극단으로 내어 몬 것은 아닐까.

학생이든 부모든 조작된 위협을 무시하고, 용감하게 우리의 두 발로 서야 한다. 몇 살이 되면 어느 수준 이상의 대학교는 가야 하고, 몇 살이 되면 어느 수준 이상의 부를 갖추어야만 하는 자가발전으로 강요된 허위적 당위를 깨고 용감하게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주위를 돌아보면 학창시절 나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 친구가 나 못지않게 또는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가? 살아보니, 물질만이 행복의 잣대이던가? 아님을 알지 않는가. 혹시 성적과 물질이 행복의 온전한 잣대가 아님에도, 그리고 그러한 증거들을 보아 왔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그 반대의 모습만을 부각시켜 아이가 공부하여야 하는 당위를 내가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열심히 해야 하는 일에는,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이 자리 잡아야지 그 결과를 위해 유보하는 행복은 평생 결코 온전히 나의 행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유보하는 오늘의 즐거움은 그걸 유보하고 노력한 오늘의 보람으로 상쇄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죽어라고 공부해서 치대를 갔으니 난 돈을 더 벌어야 하고, 내가 죽어라고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었으니 만인 위에 군림하여야 한단 비뚤어진 생각은 유보된 행복이 가져온 비뚤림일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승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매일의 행복 속에 살아야 대학교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젊어서의 고생이 즐거울 수 있지 않겠는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KAIST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좋아서 KAIST에 가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행복의 잣대를 결과지표인 경쟁에서의 승리와 대학교 입학, 승진, 입신양명에 맞추어 놓은 사람은 벼랑위에서 외줄을 타는 것과 같다. 외줄 위에서 버틸 수 있다면 그 동안은 살아 있을 것이로되, 외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은 목숨과 같다. 카이스트의 연이은 비극은, 우리 모두가 물질, 경쟁, 결과에서만 행복을 찾지 않는 내가 될 때 비로소 멈춰질 것이다.  갖고 있음이 감사하지만 갖고 있지 않다 해서 비참하지 않은, 경쟁에서 이김에 행복하지만 경쟁에서 진 타인을 비웃지 않고, 경쟁에서 졌다고 남을 시기하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을, 결과도 좋으면 더욱 행복하겠지만 과정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 그런 삶을 살려면 우리는 조금 더 용감해져야 하고, 이러한 용기를 서로 북돋아야 한다. 사람 바꿔치고 등록금 제도 바꾸는 땜질처방으로 저 비극이 끝났을 것이라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박덕영(본지 논설위원, 강릉원주대 치과대학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7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양정강 2011-04-13 15:20:23
고맙습니다.
알면서도 못하고,안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요.

신선정 2011-04-13 14:37:03
동감입니다. 출산을 앞두고.. 엄마가 될 준비를 하면서.. 행복의 기준.. 교육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공부를 잘해서.. 시작한것이 아니라.. 공부가 하고 싶어서.. 하고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

100%공감 2011-04-13 13:35:35
딱딱한 사회적 기준과 잣대에 맞추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생동안 한번이라도 그 틀을 깰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군요.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100%공감 2011-04-13 13:35:03
딱딱한 사회적 기준과 잣대에 맞추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생동안 한번이라도 그 틀을 깰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군요.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김기현 2011-04-11 17:05:15
되새기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자식에게도 행복을 키워줄 수 없다는 말이 새삼 생각나네요..^^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