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문화와 시장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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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문화와 시장지배
  • 김광수
  • 승인 2011.04.2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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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광수 논설위원

 

신문의 논설이라면 사회적 잇슈에 대한 견해를 주장하는 내용을 쎠아하나, 세상 일에 대해서는 어느 하나 정확한 전문적인 지식을 전해 드릴 수 없으니 독자들께 좀 미안하다.

사대강 삽질이나, 팔대강 삽질이나, 원자력 발전의 해로움이나, 혹은 보건복지 정책의 뒷걸음질, 혹은 카이스트 문제로 나타나는 우리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들, 혹은 건강보험의 문제, 구강보건 예산과 조직의 문제 등 심각한 문제들이 많으나, 이런 전문적인 내용을 강하게 전해드릴 수 없음이 독자님들께 미안하다. 아무래도 그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되는 문제나 또한번 말씀드리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요즈음 어린 여자아이들이 하반신을 빤히 다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것을 보는 일이 매우 불쾌하고 괴롭다. 본인들은 좋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결코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중가요도 좋아했는데, 얼마 전 TV에서 대중가요 프로그램을 모처럼 한번 보려고 하다가 그것도 너무 벌거벗은 꼴들을 보기가 괴로워서 채널을 돌려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여자애들은 그토록 추운데도 그걸 참고 아랫도리를 통째로 다 드러내려고 할까. 그리고 왜 남자 아이들이 귀걸이를 하고, 밤낮 거울만 쳐다보고 기생오라비들처럼 하고 다니게 되었는가? 왜 여자들은 명품에 관심 있고, 유명하다는 밥집을 찾아다니며 가소린을 소비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도 바글대는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것일까. 왜 애가 자살을 하는 괴로움을 겪더라도 부모들은 카이스트에 자식들을 집어 넣으려고 과외를 시키고, 대치동으로 이사를 하고 시험정보를 빼내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조선일보는 그런 카이스트를 끼고돌고 싸고도는 것일까? 그리고 왜 신정아 같은 사람은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더러운 사회에 대해서 더러운 방식으로 복수의 비수를 꽂는 것일까.

나는 건치신문이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일 만으로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신문의 룰이란 답까지 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런 문제들의 답은 그리 바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자애들이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이른바 인기를 얻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잘차린 여자애에 대해서 “또 누구를 꼬시려고 그렇게 차리고 나왔니?” 했다는 말이 여성모독이라고 지탄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말하는 것이 성희롱이라고 지탄받고 금지받고 처벌받기 때문에 정답도 말할 수 없는 사회이다.

그처럼 모두가 짜고치는 범죄처럼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 조차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는 금기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마치 모두가 지켜야 하는 위선이라는 비밀을 폭로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소중한 것이고, 신체는 자기를 위해서 소중한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옷도 든든히 입어야 하고, 생활을 위해서는 소비를 절제하고 검약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 건강을 해쳐 가며, 가려야 할 곳을 내보여 가며 비싼 옷과 장신구와 화장에 돈과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다(성적 노출은 사회가 지켜야 할 성적 규율을 파괴시킨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재래식 시장에서 싸고 실용적인 옷을 사지 않고 몇배의 값을 주더라도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을 산다든지, 혹은 그리 퐁족한 용돈이 아님에도 사오만원짜리 저녁을 먹으면 좋아한다든지 하는 그런 풍조들은 결코 올바른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이런 행동과 사고를 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사람들은 생활비에 쫒기고 용돈에 쫒기고, 박봉에 쫒기고 실업에 쫒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절약의 미덕을 내던지고 소비 풍조에 떠다닌다.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로운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다니는 것일까. 왜 불쌍한 우리 국민은 스스로 불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풍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비문화에 노예가 되어있는 것일까. 노예란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일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생산을 근본으로 하는 경제체제이다. 자본의 생산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위해서 사람을 노동자로 만들었고, 분업을 만들었고, 공장을 만들었고, 과학기술과 대학을 만들었고, 전쟁과 무기를 발전시켰고, 시장을 만들었다.

도시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도시의 기원은 시장이다. 공고한 사적소유 개념도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생산을 촉발하고, 소비를 촉발하기 위해서는 사적소유개념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생산과잉에 봉착하였다. 그리고 자본은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정치를 움직여 왔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최종적인 단계에서 소비에 의존해서 지탱하게 된다. 소비가 되지 않는다면 자본은 존속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비를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문화를 위한 대중지배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다각적으로, 총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오랫동안 공고히 이루어져 왔다.

특히 이를 위하여 자본은 언론을 지배하고, 광고를 지배하고, 문화시장을 지배하고, 문화정책을 지배하고, 교육정책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민들이 실제로는 그토록 가난한 것이 아님에도 불필요한 물건들을 가지지 못해서 안달하고, 괴로워하고, 동시에 불필요한 물건이나 생활들을 누리는 것이 사회적 성공이고 성취이고 발전이라고 생각것도 결국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적 가치관에 마비된 연유 때문이다.

짧은 치마도 유행에 따른 것이고, 유행이란 역시 패션시장이 창출해 내는 것이다. 물론 대중문화시장이 창출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상업성으로 치자면 성의 상품화가 가장 손쉽고도 수지맞는 일이다. 어린 아이들이 추운 겨울에도 아랫도리를 내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것도 이런 자본가들의 돈벌이에 놀아나기 때문이고, 자신도 또한 쎅시한 여자가 되어 괜찮은 남자, 즉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성이 높은 남자를 물기 위해서이다.

잘 사는게 뭐가 나쁘냐고 말할지 몰라도 대부분의 민중은 그런 잘사는 생활을 구조적으로 누릴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민중들이 그러한 소비 문화에 중독되어, 스스로가 매우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민중을 그러한 소비문화에 중독되도록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자본가이다. 이러한 불행은 비단 민중이라고 표현한 추상적인 집단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젊은 치과의사들이 은행에서 큰 빚을 져서 개업하면서도 그 돈을 갚지 못해 고생하고, 무리하게 과잉진료를 하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닌가. 불쌍한 후배 치과의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돈이 없으니까 불행하고, 돈이 있으면 행복해 질것이라는 착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런 생각이 자본이라는 괴물을 스스로 키우고 있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앙드레 고르라는 사람과 강수돌이 쓴 책을 보고 많이 배웠다. 이 두분께 감사드리며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함께 이루자는 희망을 가져본다.

김광수(본지 논설위원, 한양여자대학 치위생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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