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 같은 지리산 종주로 나를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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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품 같은 지리산 종주로 나를 다스린다"
  • 편집국
  • 승인 2011.05.1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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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탐방] 광전건치 토대를 일궈 온 김무영 회원

 

조용하고 매사 진중할 것 같은 그가 막상 당구와 골프는 물론, 바둑 공인 5단의 실력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뭣이든 잘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스로를 ‘잡놈’이라며,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며칠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그는 필시 또 지리산의 어느 이름 모를 능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건치라는 이름의 전문 의료인 운동의 새 뿌리를 내려온 살아있는 증인 김무영 회원(56).

“마음이 편하죠. 엄마 품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요. 지리산만한 산이 없어요.”

지난해만 해도 5월 하순에는 종주, 7월에는 19시간에 걸친 왕복 종주, 9월께는 경남 산청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을 탔던 그다. 무박 태극종주는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 어쩌면 고독과의 싸움이다.

“등산로가 아닌 곳을 이용하는 것이죠. 발밑에선 산죽이 때리고, 위를 보면 앞이 꽉 막혀 있고…….” 취미라기엔 별 고약스런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부친의 얘기를 듣게 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동국대 경제학과 출신인 부친은 해방 직후 정치적 격변의 과정 속에 있었던 인물. 당시는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이었다. 당시 우익 반탁 학생운동을 주도한 곳은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진영의 전위부대 성격이었던 전국반탁학생연맹으로, 당시 중심인물은 원로 정치인 이철승씨. 이때 부친이 동국대 총무 위치였다니, 정치적 격변의 과정에서 세상과 조우한 부자의 모습이 새삼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75학번인 그는 어쩌면 불우한 세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1975년 4월 9일 도예종 등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4월 어느 날, 그의 발길은 어느새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듣기 위해 광주YMCA 강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학시절은 그렇게 시작됐다.

1979년 여름방학 무렵부터 조선대 의대, 치대, 약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아람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알고 행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곧 10·26 박정희 저격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뒤이어 일원 중 3명이 구속되거나 수배되면서 자연스레 동아리가 와해되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둘째 아들 이름 ‘아람’은 여기서 따 왔다.

이런 가운데 1980년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조선대 치대 본과 3년이었던 그는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총무부장을 맡아 한창 학생회 재건 논의와 함께 4·19혁명 20주년 행사 추진위 활동에 매진했다.

“그럴 역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죠. 우선 사람이 필요했었으니까요.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그땐 싸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국은 또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곧 피의 광주학살로 마감됐다.

지난해 5월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한 흑백 수배전단 사진. 1980년 계엄사령부가 전국에 수배를 내린 60명의 수배 명단이었다. 전국 주요 인사와 함께 그도 수배 전단의 주인공이었다.

“5월 18일 광주를 빠져 나와 무작정 인천으로 올라갔어요. 부평공단 윤활유 공장에서 신분을 감추고 일하고 있었죠.”

현상금만 200만원. 살인범도 신고 포상금이 2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검거되면서 1년여만의 도피생활은 결국 끝나게 됐다.

광주로 돌아왔지만 돌아갈 공간은 없었다. 이미 제적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주변 사람들과 함께 광천동에서 노동야학을 꾸려가는 일에 일상을 바쳤다. 호주머니 사정이야 뻔하던 시절이었다.

“안주도 없이 막걸리 한잔 하는 식이죠. 차비마저 없어 산수오거리까지 걸어 다니던 때가 많았어요. 내가 옳니, 네가 옳니 서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 같이 함께 왔던 우정과 신뢰는 아직 여전히 남아 있어요.”

주변의 거듭된 권유에 따라 다시 학교에 발을 디딘 것은 1985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현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할 때였죠. 그런데 자꾸 만류하는 거예요. 누군가는 하다못해 활동을 위해 돈을 대주는 역할 하나로서도 중요하다고….”

그는 늘 동료와 조직을 우선시하는 편이었다. 설사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하자’고 스스로 다짐

“어떤 부분도 혼자 이미 결정해 놓고 내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설령 마누라와는 부딪쳤으면 부딪쳤지…. 후배들도 그것만큼은 인정했던 것 같아요.”

입학 12년만인 1987년에야 졸업한 그는 뜨거웠던 6월 항쟁 직후인 87년 7월께 무안에 치과를 개원했다. 그 때 일화 중의 하나.

“개원 하루 전이었어요. 난데없는 선물이 세 곳에서 들어왔다고 그래요. 보낼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기부 조정관, 보안대, 무안경찰서 정보과 일동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말이 무안에서 개업했을 뿐이지, 진료 이외에 대부분 생활은 광주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청년치과의사회를 모태로 출범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지부 초대회장, 조선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의 요구가 그것이었다. 

“무안에서 오후 6시 40분에 차를 타면, 광주는 8시에나 도착하죠. 조대 민주동우회 사무실에 숨 가쁘게 도착하면 회의시간이 8시 30분인데, 몇 년 동안 그 생활하면서도 단 한 번 회의에 늦어 본 일이 없었어요.”

새벽 6시까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겨우 1~2시간 눈 붙이고 다시 무안으로 내려가는 생활을 반복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던 때였다. 건치에서 어느 정도 손을 놓을 때까지 근 10년여의 세월이었다.

“하계 수련회가 열리면 다른 지역에서는 기껏 5~6명 참석할 때, 광주·전남에서는 보통 20여명씩 참여하게 됐죠. 다들 광주·전남하면 다른 눈으로 봤죠. 지금도 그런 헌신적 열정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요.”

각별한 것은 후배들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다.

“그때는 대외적인 일이 많아 건치 내부 일은 다 후배들 짐이었죠. 그런데도 군말 없이 알아서들 다 해요. 사무실 이렇게 좀 하자 하면, 하룻밤 새 칸막이 치고, 페인트칠하고, 도배까지 어떻게든 밤새 다 해 놔요. 카리스마라는 게 그렇더군요. 내가 무슨 카리스마가 있었던 게 아니라, 후배들이 저를 지켜주다 보니 자연히 그게 생기는 거예요. 지금도 한없이 고맙죠.”

그는 각별히 다양성을 강조했다. “처음 건치를 만들 때였어요. 운영위에서 10대 수칙을 만들어 왔는데, ‘골프하지 말 것, 도박하지 말 것, 카드하지 말 것’ 등, ‘이것 하지 말자, 저것 하지 말자’는 식이었어요. 안 된다고 그랬죠. 저는 ‘뭐 하지 말자’는 것을 ‘절대 하지 말자’는 주의에요. 건치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힘은 어쩌면 편협함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넓게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근거지’와 ‘진지론’을 거듭 언급했다. 근거지가 튼튼해야 진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 설령 싸움에서 일시 후퇴하더라도 자신이 돌아갈 근거지가 튼튼하다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건치는 남다른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건치는 내 운동의 근거지이죠.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할까. 설사 내가 깨지더라도 나를 안아줄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지지난해 촛불시위 때 서울에 대학 다니던 첫째 아들이 아침 6시에 광화문에 나갈란다고 전화하는 것을 보고, 새삼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는 그는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하자”고 말했다.

* 이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지부(회장 정성호) 2011년 소식지에 게제된 글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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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홍 기자 2011-05-24 16:05:45
광전지부 어느 샘께서 쓰신 건데...기자 빰치게 잘쓰셨네요..김무영 선생님...정말 치열한 삶을 살아오셨군요.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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