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짐 이제야 조금 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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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짐 이제야 조금 털었죠”
  • 편집국
  • 승인 2011.05.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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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탐방] 지역사회의 숨어있는 버팀목 광주전남지부 이충섭 회원

 

어쩌면 그도 불우한 세대 중의 하나다. 80년대 그때가 ‘암흑시대’라고 표현했던 그의 말처럼.

대학 1학년, 아직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도 없었고 또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80년 광주는 자신과 무관하게 어느덧 그렇게 곁에 와 있었다. 30여 년만에 옛 기억을 끄집어 낸 이충섭 회원(49).

신군부의 거대한 음모가 드디어 시작되던 80년 5월 17일. 담양 병풍산에서 신입생 MT를 갖고 있던 ‘흥사단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날 밤 늦게야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에서는 7공수여단이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날인 18일 오전 부랴부랴 광주로 오던 중이었다. 시내버스가 오치를 지나 학교(전남대) 후문쯤 오는데 길이 막히고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누군가 버스 안에서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이 화근이었다.

“난데없이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와 몽둥이질을 퍼부었죠. 몇 명은 머리가 깨지고. 방금 ‘물러가라’고 외친 사람이 누구냐고…….”

동승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학교 후문으로 끌려가야 했다. 이미 시위대와 한차례 격렬한 공방전을 치렀던지 호외를 들고 있던 한 지휘관은 M16 소총의 깨진 개머리판을 들이대며 잔뜩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1시간 정도 더 붙잡혀 있어야 했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이미 전쟁터였다. 공수부대원들이 대로를 장악하고, 골목골목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치더군요. 걔네들은 처음부터 머리부터 노리고 내리쳤죠. 나도 모르게 ‘전두환의 개, 돼지 역할 하지 말고 시민들 품으로 돌아와라’고 공수부대원들에게 악 써지더군요.”

그러나 어느새 자신의 발걸음도 뒤로 향하고 있었고, 무력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 저녁 무렵 하숙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달려온 누님의 손에 이끌려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빠져나왔다.

“빚진 느낌이었죠. 마음의 빚……. 결국 도망쳤다는 생각이 쉽게 안 떨어지더라고요. 거의 40대까지도…….”

지금은 좀 자유스러워졌다고 말했지만 80년의 기억을 떠올리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반쯤 붉어져 있었다.

“과외로 중·고등학생 3명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였죠. 25일째 되고 5·18을 만난 거죠. 물론 한 푼도 못 받았고……. 가을쯤 휴교가 끝나고 학교를 갔지만 수업도 하는 둥 마는 둥 1학년을 마쳤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작부터 이상한 대학생활이었어요.”

‘동사연’ 책임이사로 순천 지역운동의 구심점

1992년 고향 순천에 개원한 그는 이듬해부터 (사)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동사연)와 인연을 맺어 왔다. ‘동사연’은 전남 동부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로, 그동안 여순사건 증언 채록과 기념사업을 시작으로 순천만, 조례저수지 보호 등 생태 환경운동, 자치단체 의정 감시활동, 지역 현안에 대한 지속 가능한 대안제시 등으로 신뢰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곳. 최근에는 순천에 화상경마도박장 입점문제로 싸움이 한창이다. 현재 이사로 활동 중이다.

동사연이 걸어 온 길만큼 기억할만한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해방정국의 여순사건과 격동의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민중들 사이에서 애끓는 가슴으로 숨죽여 부르며 구전되던 노래들을 발굴·채록해 음반을 냈던 것은 각별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대개가 작자 미상이고 악보도 없는 터여서 지역 방송국의 녹음자료 확보와 역사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의 노래를 찾아 수없이 발걸음을 해야 했던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채록, 편곡, 연주, 섭외, 녹음, 편집까지 이어지는 엄격한 과정은 음악에 문외한인 그에게 인내와 고통의 과정이기도 했다.

“작곡자가 월북한 경우 수소문해 그 부인한테 허락을 얻어내고, 호주에 살고 있는 작사자한테까지 연락해 허락을 맡아야 했죠. 그것도 안 되면 지역신문에 공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아마추어로서는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 두 번 다시는 못할 일이에요.”  

‘여수 블루스’, ‘오동도 엘레지’, ‘봄이면 사과 꽃이’, ‘지리산 비가’, ‘산동애가’ 등 13곡의 노래와 1편의 시 낭송이 담긴 여순 10·19사건 희생자 추모 음반 『봄이면 사과 꽃이』라는 제목의 이 음반은 2년여의 산고 끝에 이렇게 잊혀진 노래를 다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좌우 이념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논리로 접근해서는 해결이 잘 안 되죠. 죽인 사람도, 죽임을 당한 사람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슬프고 무겁지만 ‘진혼곡’ 그 아픔 그대로 가기로 했죠. 물론 이런 음반이 뜨기는 원래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40대에 공부하는 치의학의 기초 ‘재미 쏠쏠’

순천작가회의 박두규 시인과 안준철 시인, 그리고 사진작가 이돈기씨 등과 함께 땀방울을 들여 출판한 몇 권의 시집과 사진집들도 나름의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순천만을 다룬 『사람의 바다』(2002), 섬진강을 주제로 한 『강』(2003), 지리산을 주제로 한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2006)가 그것이다. 사실 이들 책 한권 한권의 책갈피 속에는 책임이사 역을 맡아 재정문제까지 떠안겠다고 나선 그의 고집스러운 노력이 숨어 있다.

“순천만이 지금은 관광지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개발논리에 의해 파괴돼 가던 시절이었죠. 고생은 했지만 나름의 보람은 있죠.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책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 제 역할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여순사건에 대한 이런 활동은 ‘(사)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가 출범하게 되는 촉매제가 됐다. 8년 전쯤이다. 그런데 좀 어려워졌다. 정권이 바뀌고서부터다.

“위령탑을 세웠는데, 위령탑에 들어가 있는 문구 몇 대목을 가지고 뒤늦게 시비를 거는 세력들이 많아요. 여기저기 투서하고, 투서 때문에 임원들이 줄줄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좀 어렵겠어요.”

사실 그는 수돗물 불소화사업에 관한한 손꼽는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다. 대학 재학 때부터  공중구강보건학에 관심을 가져 온 그는 불소화사업 문제로 환경단체와 시비가 불거지자, 진실공방을 위해 미국 쪽 자료를 일일이 찾아 『시민구강보건-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1995)라는 자료집을 낸 데 이어, 불소화사업 운동 사례를 중심으로 살핀 『시민구강건강을 위한 상수도불소화사업』(1998)을 펴내기도 했다.

책으로 말하면 이 뿐이 아니다. 그는 요즘 한창 자유느낌 치과진료(pd)에 대한 연구에 푹 빠져 있다. 미국인 출신 치과의사 비치씨가 창안하여 일본에 널리 알린 치료 방법으로 고유감각을 이용해 가장 빠르고 정확하며 효율적인 치과 치료자세와 방법에 대한 컨셉(pd)을  배우고자 함이다.

“치과의사들도 50대에 이르면 70% 이상은 근골격계 질환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항상 고개를 숙여서 치료하다보니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저도 허리가 아프고 목도 아프고 해서 생각해 보니, 20여년 치과 일을 하면서도 치과의사의 기본자세조차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 있죠? 하나같이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에서 감각에 의해 일하다 보니 달인의 경지에 오르잖아요. 검도도 골프도 기본자세가 중요하잖아요. 치과치료도 마찬가지죠.”

일본어를 한 글자도 모르는 그였지만 지난해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맡아 했다. 치과의사 비치씨의 강연을 토대로 일본에서 출판된 『0(제로)으로부터의 궤적』 책이었다.

“책 반향이요? 전혀 없었어요. 그냥 늦깎이로 40대에 와서야 치의학을 기초부터 공부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그 재미가 쏠쏠해요.”

* 이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지부(회장 정성호) 2011년 소식지에 게제된 글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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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2011-05-29 19:47:04
수고 많이 하시는군요. .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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