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창]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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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창]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 신순희
  • 승인 2005.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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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에 대한 고찰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묶고 뼈를 부러뜨려 기형적인 작은 발을 만들었던 중국의 전족 전통(?)을 공산당이 폐지했을때,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던 이들은 전족으로 고통 받았던 여성들 스스로였다. 그들에게 전족은 계급과 아름다움, 자부심의 상징이었고, 심지어 강제 전족풀기를 비관해 자결하는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다 한다.

일부 종교와 부족의 전통(?)에 따라 어린 딸의 성기를 절단하는, 일명 '할례'를 주도하는 사람은 대개 아이의 친어머니이자 성기절단 피해 여성들이다. 평생 그로인해 고통 받더라도, 전통에 따라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 진정 자랑스러운 성인 여성이 되는 길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남에게 피해가 가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을까? 김영하의 소설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는걸까?

자발성 혹은 자유의지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이다. 인간의 역사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역사라 정의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자발성'의 이름 뒤에 감춰진 이같은 그림자는 무엇인가?

때때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억압하고, 여성 스스로 더욱 아들에 집착하고, 여성 환자가 여성의사를 불신하고, 여성 유권자가 여성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미국의 남녀평등헌법의 반대를 주도했던 단체도 여성단체였다. 이 모두가 자발적 행동들이다.

이것이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유, 그 고귀한 자유의지에 따른 인간의 선택이란 말인가? 이런 일부 여성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자발성이, 과연 일부의 문제일 뿐인가?

사실 나 또한 자신이 없다. 때로 내 뜻과는 무관하게 내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편견에 지배당함을 문득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수천년간의 역사속에서 지속되어 온 어떤 가치가, 나에게 그 옳고 그름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마치 원죄인양 내 안에 녹아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자발성의 이름으로 나에게서 불쑥 튀어나옴을 어느날 문득 느끼곤 한다.

인간의 축적된 역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도약의 발판임과 동시에 이렇듯 벗어나기 힘든 굴레이기도 하다.

여기 한 성매매 여성이 있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성매매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녀와 그녀 가족의 생계가 그녀의 성매매수입에 달려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살고자하며, 때때로 자신의 일에 보람도 느낀다.

나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약자인 그녀가 당연히 사회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모든 여성이 다 사창가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사회구조적인 탓으로만 돌린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고민한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거라고 걱정한다.

현실적으로 생계에 대한 다른 대안도 쉽지 않음을 안다. 성매매현장에 대한 지원은 성산업의 구조강화가 아니겠냐는 질문에도 늘 자신있지는 않다. 그리고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범위에 대해서도 갈등한다.

이런 고민과 질문에 사실 나는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결코 완전한 답을 얻지 못할런지 모른다. 다만,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 것 같다. "모든 질문은 다른 누구를 향해서가 아니라 질문자 자신을 향해 먼저 던져야 한다는 것."

누군가를 향해 쏟아내는 질문의 깊이와 내용은 나 자신의 깊이와 내용에서 자유롭지 않고, 나는 또한 이 사회와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노숙자나 도시빈민, 혹은 그 어떤 다른 사회적 약자를 향해서는 가장 먼저 던지지 않았던 질문이 유독 누군가에게만 쏟아진다면, 같은 대상에 이미 다른 질문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의 시선을 의심해 볼 일이다.

내가 그토록 분개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피해자 비난의 시선을 나 스스로도 확대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그녀의 선택 속에, 자연스러운 질문이라는 나의 시선 속에, 전족과 할례를 스스로 옹호했던 여성들의 왜곡된 자발성이 녹아 있지 않은지 말이다.

물론 그 누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 누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의 불완전함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성찰과 깨달음으로 나를, 그리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는 힘에 있다고 믿는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 안의 편견을 부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전족을 풀지 못해 자결했던 여인은, 편견을 부수지 못하고 자신을 부수어 버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순희(서울 이대푸른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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