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푹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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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푹 빠졌어요”
  • 편집국
  • 승인 2011.06.0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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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탐방] 일상의 도전에서 행복 찾는 조부덕 회원

 

본래 많은 주근깨만 빼면 그녀의 낯빛이 한결 밝아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녀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게 긍정적으로 변하게 됐다”고 했다. 광주시 북구 풍향동에서 ‘하나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조부덕 회원(48)이다. 

그녀의 하루는 아침 6시에 시작된다.

“수영을 시작한 지 올해로 22년째에요. 1만 시간 법칙이라고 하잖아요. 무엇에서 달인이 되려면. 하루 1시간씩 20년 한 셈이니, 앞으로 10년만 더 하면 되겠구나 생각하죠.”

언제 그런 짬이 있을까 싶다. 이제 대학에 입학한 큰애부터 아직 유치원생인 막내까지 4남매를 두고 있는 형편이다. 더군다나 주말부부 신세. 남편은 2년여 전부터 순천에서 외과의사로 근무 중이다.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까,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할까. 5개월여 전부터는 새로 탁구 레슨까지 시작했단다. 뭘 배우러 가면 대부분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은데 비해, 탁구는 30~40대가 많아 좋다고. 진료시간을 좀 줄이더라도, 대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가질 생각이란다. 

광주에서 처음으로 ‘자유느낌’ 치료 시스템 갖춰

어느 때부터인가 삶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교정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죠. 세계여행 기회도 갖게 되고 새로 만난 여러 나라 사람들과 소식도 주고받으면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세상 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할까요.”

자유느낌(Proprioceptive Derivation) 치과치료에 관심을 가져 온 것은 5년여 전이다.

“교정공부 하는 모임에 갔다가 소개를 받았는데, 철학적 의미도 있고, 생활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죠. 결국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하고, 모든 것이 내 마음의 평화를 기본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결혼하고서도 한동안은 뭘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한편에 짓눌려 있었죠. 그런데 PD진료를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생활과 신념, 내 존재 자체를 일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지난 2009년 병원을 백림약국 근처인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Dr. Beach의 자유느낌 치과치료를 위한 첨단 기자재와 시스템으로 전면 갖췄다. 광주에서는 처음이다.

일본 인간행위연구소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환자들이 가장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진료 공간을 새롭게 배치한 것인데,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의 한지 창호 칸막이를 비롯해 벽지 색상과 전구 하나까지 눈 어디를 돌려도 거슬리는 게 없는 편안한 느낌이다.

특히 지난해 10월엔 생애 어쩌면 가장 기억할만한 시간을 가졌다. 4년여의 공부 끝에 미국 트위드(Tweed) 교정학회 세미나에서 그동안 환자 사례를 통해 케이스를 발표해 합격한 것. 학회 정식회원 자격을 얻는 영예도 안게 됐는데, 같은 시기에 공부를 시작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처음이었다.

“케이스를 정리하느라 그동안 좀 바빴어요. 4년 정도 됐는데, 개인적으로 치과의사로서 어느 한 선을 넘었다는 나름의 뿌듯함 같은 게 있어요.”

사실 공부를 핑계로 미국을 오가는 일이 많다보니, 남편도 한동안 달갑지 않은 눈치였단다. “발표를 앞두고 말도 못하고 몇 번을 망설였죠. 그러다 이번에 발표를 하게 됐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대단하다’며 그때부터 달리 보는 거예요.”

그녀는 “옛날 연애할 때 기분처럼, 집안 분위기까지 달라졌다”며 “‘이런 날도 오는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끊임없는 소통 공간인 인터넷서 희망 발견

그녀는 요즘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는 페이스북(facebook)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모든 게 오픈되는 거잖아요. 내가 도덕적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죠. 그 전에는 정보나 지식의 독점이 하나의 권력이었잖아요. 그러나 개개인의 다양성들이 존중되고 모두 오픈되다보면 언젠가 내가 꿈꾸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이죠.”

사실 그녀는 일찍부터 꿈을 꿔 왔다. 높고 낮음이 없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작고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분단이 낳은 이름, 빨치산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지어 파는 건축 일을 하셨죠. 집 지어 판 돈으로 또 집 짓고.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죠. 어쩌면 현실에서는 실패한 빨치산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술을 즐기셨어요. 저녁마다 막걸리를 드시곤 했는데, 간혹 젊은 시절 활동할 때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셨죠. 저에겐 너무 익숙한 모습이었죠. 아버지와는 너무 잘 맞았고. 현재 치과가 그 골목이에요. 환자분들도 나이 드신 분들이 많고.”

이런 내력이었을까. 형제들도 불의에는 타협하지 못했다. 전남대 교수 재직 중 시국선언과 관련해 교수직을 그만둬야 했던 전 조남중 내과 원장이 대표적이다. 친오빠였던 조남중 원장은 지난 2009년 작고했다. 

“대학 때 독서토론회 활동을 했는데, 한 선배가 ‘경제학기초이론’을 읽고 발제해 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도저히 못하겠는 거예요. 그땐 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대학 본과 1학년 때부터 주위 선후배들과 함께 의료 봉사활동 일환으로 진료소 활동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빈민촌이라 불리던 광주시 동구 학동 백화마을이었다. 지역운동에 관심을 뒀던 사람들과 연계해 인근 교회 예배당을 이용하는 식이었다.

4년여 동안의 진료소 활동에 단 한 번도 빠져 본 일이 없을 만큼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1989년엔 아예 이곳에 동료와 함께 ‘푸른치과’라는 이름으로 공동개원했다. 일종의 지역사업 일환이었다.

“병원 안에 건치 사무실을 같이 내고 제가 총무를 맡았어요. 그때는 거의 조직생활이나 다름없었죠. 생활리듬뿐 아니라, 생각 자체가 온통 건치뿐이었으니까. 그땐 시국 자체가 그랬어요.”

아픔이 없는 건 아니다. 처음 뜻과는 달리 생각지 않은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지역사업 일환으로 출발한 ‘푸른치과’는 결국 5년여 운영 끝에 해산 과정을 밟지 않으면 안 되고 말았다.

“태연한 척 했지만,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한 남모르는 상처가 있었죠. 결국 후배한테 개인치과로 돌리고 나왔는데,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좀 했죠.”

우스개 얘기이지만 그는 한때 진보신당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오르내린 적도 있었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맡고 있는 윤난실씨와는 동갑내기이기도 한데다, 같이 활동해 온 내력이 깊다. 그땐 무슨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홍보에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이름 정도 같이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 내가 이 길이 아닌데, 너무 많이 떠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그녀가 꿈꿨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은 것만큼은 변함없다. 근래 친구들을 만나고, 건강을 챙기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것 역시 그 꿈에 대한 긍정 때문이다.

“권력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실은 그게 진실은 아니잖아요. 모두 함께 고루 잘 살아야 하는 것이지. 모든 것은 소통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건치 회원들의 글이 요즘 들어 달리 보인다고. 과거 회의 결과가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것과는 달리, 자유스러운 내면의 소소한 일상과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건치가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가 내뱉는 선언이 모두 진리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봐요. 끊임없이 소통해 가야죠. 그런 점에서 저는 인터넷에서 많은 희망을 발견하죠. 조금씩 우리가 이룩하고자 하는 세상이 실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게 언젠가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이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지부(회장 정성호) 2011년 소식지에 게제된 글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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