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48]'건전한 세계화' 거스른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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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48]'건전한 세계화' 거스른 한미 FTA
  • 전민용
  • 승인 2011.11.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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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새판 짜기 – 세계화의 역설과 민주적 대안, 대니 로드릭, 21세기 북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 여부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국회에서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두고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미FTA가 우리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현재의 세계화 모델이 더는 유용하지 않다는 학계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콧대 높던 세계화 지지자들의 태도는 실망, 회의, 의문, 비관론으로 바뀌었다. 세계 경제 역사 속에는 한 국가의 금융, 산업정책을 무력화하는 금융 자유화와 자유 무역이 경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큰 해악을 끼쳤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쌓여있다.

하버드대 교수이자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저자는 신자유주의라고도 불리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hyperglobalization)의 실패를 분석하고 건전한 세계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과학적 근거들과 해석이 옳다면 한미FTA는 과거의 경험과 연구 결과에서 오는 현실적 교훈을 무시하고 시장만능에 대한 막연한 교조적 신념만으로 우리 경제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협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100년 전 세계화의 붕괴를 한차례 목격했다.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자유 무역과 자본 자유 이동을 기조로 삼던 1차 세계화는 1914년 막을 내렸고, 1차 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소멸했다. 1945년 이후 세계경제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이후 미-영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세계 금융 질서이다. 피상적인 다자간 상호 자유무역주의에 가까워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면서도 각 정부가 독립적 경제 정책과 복지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 고정 환율제도였고 국제 자본 흐름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1970년 들어 오일쇼크가 선진국을 강타하고 스테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브레턴우즈체제 지속이 어려워졌다. 자본 통제를 옹호하는 신념체계가 흔들리면서 자본 이동 자유화의 장점을 강조하는 담론들이 속속 등장했다. 1980, 1990년대에는 더 깊은 경제 자유화와 통합을 지향하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hyperglobalization)이 등장했다. 국제자본시장에 대한 통제가 사라지고 개발도상국들은 국제 무역과 투자 시장 개방의 거센 압력에 직면했다. 경제 세계화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금융 자유화로 분명히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금융시장의 중심지였던 미국과 영국이 앞장섰다. 프랑스는 경제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자본 자유화의 대열에 합류했고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본 통제 규제가 사라지고 유럽은 가장 개방적인 금융 시장이 되었다.
1961년 출범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1980년대 말 회원국에 대한 자본통제 규제를 없애고 완전한 자본이동성을 추구했다. 1994-2000년 개발도상국 및 중진국에 해당하는 여섯 나라가 OECD에 가입했고 자본자유화를 단기간에 이행했다.

케인즈학파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토빈은 1978년에 경제 위기는 어떤 환율제도를 채택하느냐는 문제보다 금융자본의 과도한 이동성이 근본 문제임을 지적했다. 그는 국제 통화 거래에 토빈세를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는 주류 경제학자가 아니었고 그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국제 자본 시장에 자국 경제를 내맡긴 국가들은 잇따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1980년대 남미국가들은 외채 위기에 관리 부실이 겹쳐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었다. 1990년대 초에는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멕시코 등에서 금융위기를 맞았다. 1997-98년 사이에 한국 등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닥쳤고, 러시아(1998), 브라질(1999), 아르헨티나(2000), 터키(2001)까지 파급되었다. 2001년 이후 잠시 소강기를 거쳐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며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등 금융시장을 개방한 나라들이 외자 부족과 파산으로 고통 받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70-2008년 전 세계는 금융 위기 124회, 외환위기 208회, 국가 부채 위기 63회를 겪었다. 다른 연구에 의하면 1800년 이후 발생한 모든 금융위기는 자유로운 자본 이동 시기와 정확히 들어맞았다. 최근만이 아니라 언제나 국제 자본 이동이 높아질 때 국제 금융위기가 온 것이다. 금융 세계화는 항상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금융 규제 완화를 원하는 국가뿐 아니라 엄격한 통제를 원하는 국가도 아우를 수 있는 국제금융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국제 규제 기준을 개선하고 각국이 자본을 통제하고 금융 거래에 세금을 매기고 과도한 차입금을 억제하는 조치들이 필요하다. 자율과 규제 사이에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또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유행하는 경제학 이론에 건전한 의문을 품고, 과거의 교훈을 오래 간직하고, 이론뿐 아니라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을 신뢰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단일한 이론만 추구하는 경제학자보다 다양한 관점을 흡수할 줄 아는 경제학자와 정치가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1990년대 너도나도 부르짖었던 무역근본주의는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동안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었고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각국의 적극적 산업정책이 필수적이라는 시각이 재조명 받고 있다. 당연히 각 국가에는 다양한 맞춤형 대안을 실험해볼 재량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무역근본주의는 수많은 기술 관료, 정책 입안자의 의식, WTO의 규정, 다국적 기관들의 관행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다. 세상은 변했는데 이들은 지금도 앵무새처럼 무역근본주의를 외치며 양자 또는 지역 단위의 자유무역협정을 확대하고 있다.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과 민족적 민주주의는 충돌한다. 투자자의 이익을 우선 고려할 경우 정부의 민주적이고 공익적인 정책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따라 1997년 미국 회사는 멕시코의 지방자치단체가 유독성 폐기물 시설에 대한 공사 허가를 거절하자 국제 재판에 소송을 걸어 1560만 달러를 보상 받았다. 미국의 화학회사는 휘발유 첨가제 사용을 금지한 캐나다 정부에 소송을 걸어 합의금으로 1300만 달러를 받았다. 2007년 이탈리아의 광산회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 정책인 흑인 우대 정책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소송을 내어 3억 5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 민주주의, 민족국가라는 세 마리 토끼는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 이것이 경제 세계화의 트릴레마이다. 세계화와 민족국가는 함께 갈 수 있지만 이때는 앞의 세 개의 사례들처럼 공익에 기반 하는 민주주의는 포기해야 한다. 물론 민족국가를 포기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글로벌 거버넌스다. 표준 설정 권한을 가진 국제 기관이 법적 정치적 책임을 가지고 시장을 조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연방제를 확대한 세계 연방제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개별 국가의 주권은 상당히 축소될 것이며 실효성도 의문이고 아직은 이론적 수준일 뿐이다.

민주주의도 민족국가도 포기할 수 없다면 남는 방법은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깊은’ 세계화)을 포기하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은 허구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던져야 한다. 이런 현실을 직시할 때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세계 질서를 정립할 수 있다”(335) 해외무역에 대한 많은 제약을 없애고 자본 유입에 대해 통제하고 국가별 산업정책을 허용하였던 브레턴우즈-GATT 체제 정도의 ‘얕은’ 세계화를 받아들여 21세기의 시대적 요구에 맞게 고친 새 브레턴우즈 타협을 창조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는 건전한 세계화와 새로운 자본주의 원칙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원활한 시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 제도와 규제 기관이 필요하다.            
* 개별 국가들은 자유롭게 자기 나라에 가장 적합한 제도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 세계화는 각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 삶의 질 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
* 어느 나라든 자국의 제도를 다른 나라에 강요할 권리는 없다
* 지구온난화 같은 문제는 세계적 협력을, 세계 경제 문제는 해당 국가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국제 규범이다
* 국제 금융 규제를 해야 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 잘 정리된 세계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다. 저평가된 위완화로  지나친 무역 흑자를 내고 있는 중국에 대한 대안과 선진국 중심으로 여전히 꽁꽁 묶여 있는 세계 노동시장 개방에 대한 제안도 읽어볼 만하다. 우리나라에 맞는 경제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없지만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은 많다.

한미FTA는  위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원칙들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협정이다. 이 협정은 이미 실패로 판정 난 ‘깊은’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자본 통제와 각국의 고유한 경제정책의 수립의 길로 가야하고 갈 수 밖에 없는데 한미FTA는 이것을 어렵게 만든다. 미국의 제도와 법을 이식하고 우리의 자주적인 정책 결정권을 침해 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경제도 실패하고 민주주의도 후퇴한다는 것이 여러 사례로 입증되었고 2008년 이후부터는 경제학계에서 널리 공감되고 있다. 지금의 한미FTA 비준을 당장 중단하고 건전한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재협상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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