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52]‘임신 캘린더’와 ‘호텔 아이리스’
상태바
[전민용의 북카페 -52]‘임신 캘린더’와 ‘호텔 아이리스’
  • 전민용
  • 승인 2012.01.26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민용의 북카페]

 

“어! 늦둥이 가지셨어요?”(지인). “이런 책을 왜 샀어?”(아내). 소설 ‘임신 캘린더’의 제목을 보고 보인 반응들이다. 오가와 요코의 제 104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임신 캘린더’는 임신을 다룬 이야기이긴 하지만 임신에 대한 다른 틈새를 보여준다. 이 소설 속 임신은 축하나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덤덤하다. 부부 사이의 관계가 나빠서도 아니다. 화자인 임신부의 여동생과 언니, 형부 모두 임신을 특별히 좋아 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임신의 과정이 진행될 뿐이다.

▲ 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이레
신경증이 있는 언니는 입덧도 유달리 심하게 하고 입덧 후에도 폭식을 한다. 동생은 폭식하는 언니에게 강력한 발암성 물질을 뿌린 걸로 알려진 미국산 그레이프프루트로 계속 잼을 만들어 주고 언니는 엄청나게 먹어댄다. 어떤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동생은 그레이프 프루트가 태아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강한 존재니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에 하나가 종족 보존 본능을 무조건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얼마 전 ‘남극의 눈물’이라는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펭귄 부모가 보여주는 처절할 정도로 헌신적인 알 부화 과정이 화제가 되었다. 인간보다 낫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본능의 지배가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 임신과 인간의 선택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볼 여지를 주는 소설이다.

‘임신 캘린더’에는 ‘기숙사’와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이라는 두 편의 단편이 더 등장한다. 세 작품 모두 현실을 살짝 비틀어 다른 틈새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로 보자면 잔인한 폭력물도 드라마도 아니고 그 중간 어느 지점이다. 갈수록 지나치게 잔혹한 내용이 관심을 끄는 현실에서 잔인한 영화 장면을 차마 똑바로 못 보고 손으로 눈을 가리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정도의 오싹한 내용들이 이어진다.

장편인 ‘호텔 아이리스’. 목소리가 있었다. “시끄럿, 씨팔년”. 냉정하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굵직한 목소리. 짜증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는 악기 소리 같은 울림.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호텔 아이리스의 프론트를 지키는 아름다운 소녀 마리는 마음이 흔들린다. 유전적 심리적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고 우연일 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오직 그 목소리 때문에 우연히 다시 만난 그를 쫓아가고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다.

▲ 호텔 아이리스, 오가와 요코, 이레
마리는 그 목소리에서 나오는 명령에 복종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사랑을 나눌 때와 평소의 모습이 너무나 다른 이중인격의 남자. 죽은 아내에 대한 상처로 몇 십 년의 세월을 외롭게 살아온 남자. 자신을 사랑해 주던 아빠는 살해당하고 애정 없는 엄마 밑에서 이용만 당하면서 살아 온 열일곱의 마리. 큼직한 상처를 안고 있는 둘의 사랑은 그 상처 크기만큼이나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다. 점점 더 심한 폭력이 동반되고 더 이상 둘만의 비밀스런 사랑이 불가능해질 즈음 세상이 급작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든다.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난다. 사랑에 대해 또 다른 틈새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남자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가 약간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전편에 흐른다.   

나는 온오프라인의 책 할인 코너에서 특가로 팔리는 일본책들 중에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끼의 책이나 아쿠타가와 수상작이 있으면 대체로 산다. 동네 서점에 갔다가 60% 할인 매대에서 두 소설이 눈에 띄어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이만하면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이레
호텔 아이리스, 오가와 요코, 이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