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네가 겨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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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네가 겨울이구나
  • 한명숙
  • 승인 2005.03.04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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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에 간다

가지산 설화에게

내린 눈들은 다 서둘러 녹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녹지 않고 꼿꼿이 얼어서 한 웅큼 시간을 물고 버티는 너는
겨울바람과의 이별을 질기게도 끌고 있구나
떠나는 사랑 앞에
변하는 사랑 앞에
얼어붙은 몸 곧추세우고
패악을 부리듯 사방으로 뾰족하게 일어 설줄 아는구나
그래 그래 암 암
너는
나처럼 쉬이 포기 하지 말고
마음껏 미워하렴
마음껏 원망하렴
봄이 오는 길에는 작은 흔적도 남기지 말고
모두 날려버리게


새벽 5시에 산을 오른다. 가지산, 백두대간에 달려 있는 낙동정맥의 끝자락을 이루는 산들 가운데 꽤 우람하다고 평가되는 산이다. 달은 둥글게 영글어 있었고, 높이도 올라가 있었지만 그 밝음은 멀어져가는 친구의 얼굴처럼 아리고 차갑기만 하다. 석남터널의 오른쪽 편에 마련된 계단을 시작으로 1시간 정도만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산의 능선을 올라 탈수 있는데, 그 능선위에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진한 먹물의 한 획처럼 굵게 한줄로 흘러 내려가며 등산길을 에워싸고 있다.

너무 어설프고 빠르게 도착한 서른 아홉 번째 생일날을 자축하고 싶은 욕심에 진료시간에 방해를 받지 않는 산행일정을 짜다보니 꼭두새벽에 산을 올라 산신령을 귀찮게 하는 별난 손님이 되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산길을 타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걷고 또 걷는 일이다. 일행은 동네에서 산행이라면 한가닥 한다는 커피가게 아저씨와 마라톤을 무척 즐기시는 오십대 중년의 또 다른 아저씨다.

두 시간 가량 걸어서 정상이라고 기운차게 뻗대고 있는 바위 덩어리 앞에 왔다. 길을 수평으로만 다녀 본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사방은 눈에 쌓여 있고 희지 못하고 검지 못한 일행들의 몸 색깔만 외롭게 도드라진다. 우리는 입을 벌린 채 차가운 산정의 바람을 들어 마시면서 연신 감탄한다.

눈에 덮히고 다시 그 위에 얼음을 두르고 영하의 온도에 하루 종일 차가운 바람에 몸을 담근 채 일어서고 앉아 있는 나무들 속에서는 인간 삶의 고통과 고민이 허접하다. 봄의 부활을 완고하게 믿기에 빈틈없이 얼어 꼼짝 않는 그들의 모습은 오래 전에 있음직한 신앙인의 자세 같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 하나에 매어달린 얼음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는 유리로 만든 풍경의 소리를 듣는 듯 했고,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눈 속에 숨어 있는 듯 나무와 바위들은 눈과 바람, 그들이 만들어낸 기묘하고 화려한 모습이 눈과 뇌 속에 깊게 파고든다. 공식적인 겨울이 지난 삼월에 제대로 아름다운 겨울을 만난 거다.

능동산, 간월산, 백운산, 취약산, 운문산 등 주변의 다른 많은 산들의 정상위에도 눈 덮힌 모습이 보였지만 가지산만이 햇뜰 무렵 반짝이는 흰빛을 유난히 보였던 이유가 투명하게 얼어 있는 이 나무들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등산로는 눈을 야물게 밟아 놓은 이들 덕분에 아주 미끄러웠고 결국 깡깡 얼어 있는 바닥에 얼굴을 찍고 넘어지면서 입맞춤을 하고 말았다. 넘어지는 일들이 그렇듯 나는 아픈데 동행들은 큰 웃음꺼리를 선물받은 듯 활짝 웃고, 나의 투덜거림에 마지못해 걱정되는 한마디를 한다. ‘아직 무공이 모자라 낙법이 서툴군.’

하산 길을 재촉하며 내려오는 길에 반가운 이들이 또 있다. 1000미터가 넘는 이런 곳에 사는 흰염소 3마리. 풀이 없는 곳이니 풀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등산객들이 흘렸거나 던져 놓은 먹이를 찾는 듯 보인다. 기껏 날아가는 새들 몇 마리를 이 가지산의 동물친구라 여겼는데, 점잖은 염소를 세 마리씩이나 만나니 발길을 쉽게 옮길 수 없다.

운문산을 저 멀리 바라보며 하산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800미터 높이의 암릉이 많아 보이는 백운산의 작고 빼어난 자태도 눈에 담는다. 아랫재 갈림길에서 가지산 정상의 눈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에게 속으로 ‘언젠가는 혼자서 다시 오마’라고 중얼거리며 추파를 던져보지만, 그는 관심 없는 듯 하늘만 만지고 놀고 있다. 하산 길은 1시간가량 구룡소폭포를 지나 호박소라는 곳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구석 구석 사람들의 기원이나 아님 심심한 장난으로 쌓은 듯 보이는 돌탑들이 많이 흩어져 있고, 재래식 화장실을 연상케하는 낡은 양철판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암자같지 않은 암자가 있다. 산에 와서 소원을 빌어야 하는 이들의 다급한 마음의 흔적이라 여겨져 안서럽다.

산과의 애정이 당분간은 지속될 듯 한데 오늘 가지산에서 뜨거운 겨울의 입맞춤이라도 받은 양 즐겁고 흥분된다. 한두 달이 지나면 이 곳에 봄이 오고 그 유명한 철쭉들이 이 넓은 가지산 정상부위에 붉은 꽃불을 피우겠지. 그 철쭉 꽃잎들이 유난히 붉고 깨끗한 이유가 산꼭대기에서 길고 지루한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 내공을 키웠기 때문임을 나 홀로 떠들어 주고 싶지만, 가고 싶은 산이 아직 너무 많아 발길이 바쁘고 분답다.

한명숙(경주 고운이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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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기 2005-03-08 14:59:23
하시는군요...울산오시면 연락이라도 함 하시지.

송학사 2005-03-05 09:12:45
무언가 애절해 보이는구려.

산을 오르면서 산에 토해내는 상념은,
인간세의 모든 인연의 끈질긴 그 무엇일텐데...

한 선생 산에 한번 꼭같이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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