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3층에 있던 네 개의 학급 중 떠드는 반은 우리 반 뿐이라는 식이다. 심하게 반항적이거나 심성이 나쁜 애들은 아니었는데, 어째 사건 사고가 많다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안 좋은 것은 항상 1등이고, 꼴통반으로 불리던 그 첫 경험이 중학교라는 낯선 환경과 천주교 재단의 근엄한 분위기와 더불어, 어린 우리를 괴롭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학기가 되었다. 선생들의 분노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초기대처방안이나 자율학습시간에 안 떠든 척 갑자기 조용해지는 방법, 체벌시에 선생의 동정심을 유발시켜 매를 줄일 수 있는 비굴한 몸짓 및 불쌍한 표정을 짓는 방법 등을 암암리에 공유하게 되었고, 우리는 혼나면서도 가끔씩 미소 짓는 여유를 잃지 않는 강철로 단련되어 갔다.
공부나 청소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왜 접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학년이 되고나서는 시원섭섭했다고나 할까? 맘 편히 꼴찌를 했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던 자유로운 영혼들이었지만, 다시 일상적인 중학생이 된 것을 감사해 했다.
쉬는 시간에 가정실습시간 준비물로 가져온 국수가닥을 먹겠다고 서로 아둥바둥하다가 국수를 온통 바닥에 흩트려 마룻바닥 사이사이에 낀 국수를 가정선생님 지도하에 반 학생 모두가 들고 일어나 일일이 빼내던 기억이나,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수학 선생님 시간에 뜬금없이 감자 몇 개가 선생님 발쪽으로 굴러가 생뚱맞게도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감자의 주인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은 정말 색다르지 않은가?
뒤돌아보니 우리 반은, 말하자면, 당시 인천 B여중의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삼미의 아마추어리즘적인 야구야말로 인간을 시스템의 일부로 만들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 시스템에 대한 반항이었노라 너스레를 떠는 어느 소설처럼, 우리의 B여중 1학년 5반 역시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에 반항하던 영혼들이 아니었나, 하는 농담을 한 번 그때 그 친구들과 나눠보고 싶다.
한참 딴 얘기를 했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박철순’ 같은 22연승의 대스타보다 어쩌다 한번 이기기도 힘든 ‘감사용’들이 훨씬 더 많다. 나도 한 때는 치과계의 ‘박철순’이 되고자 했으나, 연봉으로 따지자니 치과계의 ‘감사용’이 되어 오늘도 줄창 아말감을 판다.
강재선(인천 남동구 유명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