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60]김선우와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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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60]김선우와 김수영
  • 전민용
  • 승인 2012.06.07 12: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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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선우, 창비

 

쌍용차 희생자를 위한 바자회와 문화제가 5월 11일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영화감독 변영주의 사회도 좋았고 허클베리핀이라는 밴드의 공연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날 네 명의 시인이 심보선시인의 ‘스물세 번째 인간’이라는 시를 함께 낭송했을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시인들 중 김선우의 목소리가 가장 낭랑하게 느껴졌고 오래 여운이 남았다. 아마도 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집의 대표작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기억하는 같은 제목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이다. 정말 좋은 시지만 이곳에 싣기에는 너무 길므로 꼭 시집을 사서 전문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다른 시를 소개한다. 

어떤 비오는 날
                                                                                 김선우
 
-김수영의 방을 생각하는 빈방에서
 
   1
가지고 있던 게 떠났으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꿈 없이 사는 일이
아주 무거워
꿈이 떠나서
몸이 무거워

   2
세상의 물방울들아 쪼개진 것들아 쪼개져서도 흐르는 덜 자란 혁명의 격렬한 불면증들아 빙하에서 풀려난 물방울이 더러워진 허공의 상주(喪主)가 되는 비애를 생각한다 빈방을 마저 비운 창백한 몸들아 물방울 하나씩에 사금파리처럼 꽂힌 핏물을 보게 된 오늘의 내 시력이 무겁구나 눈 속은 뜨겁고 빈방은 무거우니 오늘의 숙박부에 나는 이렇게 쓰련다
닥치시오. 나는 다만 물방울만한 방을 원하오.

 

2012년에 각별한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나는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절망했다. 쌍용이 강정이 언론파업이 더욱더 힘든 시험을 받게 될 것이 안타까웠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허탈했다. 꿈이 떠나서 몸이 무겁고, 덜 자란 혁명이 주는 불면증과 핏물이 된 물방울들에 깊이 공감했다.

부재로 붙은 ‘김수영의 방’을 검색해 보았다. 두 시가 다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딛고 나아가는 새로운 결연함이나 희망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번갈아 읽어 보시길...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선우는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이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연애시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 시를 소개한다.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김선우
 
그러니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별안간
젖꼭지처럼 보인 날이다
하늘을 쳐다보다 입안에 단침이 고인 날이다
거기에 입술을 대고 싶어
배꼽 밑이 찌르르해진 날이다
 
그러니까 오리온이라는 힘센 사나이의 중심
움푹 팬 상처처럼 고인 허공에서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느낀 날이다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시선으로
살맛 달큰한 비린내가 초유처럼 흘러든 날이다
 
은하는 깊은 곳으로 찔린 듯 쏟아지고
지구인 내 취향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인지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너의 별자리들마다
모조리 양성구유인 소한(小寒) 날이다

배꼽 밑이 찌르르해지도록 섹시한 힘센 사나이 오리온이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가지고 있단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벽을 허무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지 않을까?

이 시와 대비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지만 검색하면서 발견한 김수영의 지독한 사랑시도 하나 소개한다. 남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느껴지는 시다. 하지만 자신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이 시인과 독자 사이의 벽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性(성)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튼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恍惚(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집회를 하던 날 뒤풀이에서 김선우의 시를 읽어 주었다. 이 날 북카페에 시집도 소개해달라는 김선생의 요청에 용기를 내어 보았다. 나의 사족들은 무시하고 시들만 반복해서 읽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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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2-06-11 10:01:13
오늘 부제를 부재라고 무심코 틀리게 썼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단순한 착오? 부재와 빈 방의 내용적인 유사함 때문에? 김수영의 이른 부재에 대한 어떤 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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