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6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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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6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 전민용
  • 승인 2012.07.30 10:5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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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자음과 모음

 

‘사강’ 하면 무슨 생각이 나시는지? 월드컵 사강? 연예인?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너무 좋아했던 낭만적인 아빠가 지어준 이름 ‘윤사강’.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아빠 역할에 지독하게 미숙했던, 사강이 아홉 살 때 다른 여자를 쫒아 가족을 버린 아빠. “하지마, 위험해, 더러워”를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신경증 환자였던 엄마. 열네 살에 자기 손바닥을 칼로 그었던 사강. 이런 과거를 가진 사강이 사랑을 한다면 어떤 사랑을 할지 상상이 되시는지?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실연한지 1년이 지나도 그 슬픔과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사강은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 같은 고요와 저런 햇빛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강은 바로가기를 클릭한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

치유를 클릭하자 <500일의 섬머> <러브레터>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가 떴고, 각 영화에 대한 정보가 떴다. 실연을 클릭하자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라는 글이 떴다. 이 모임을 알린 사람의 마지막 제안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할 공간을 대신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다.

사강은 1년 전부터 자신에게 배달돼 온 여러 나라 판본의 ‘슬픔이여 안녕’ 4권을 가지고 이 모임에 참석한다. 자신의 실연 기념품을 버리고 대신 다른 사람이 버린 기념품 중 낡은 로모 카메라를 가지고 온다. 사강은 이 카메라 속에서 우연히 낡은 필름을 발견하고 이 필름과 현상한 사진을 돌려주기 위해 사진 속 인물을 찾으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로모카메라의 주인은 지훈이다. 캠퍼스 커플로 시작하여 10년 간 사귀어 온 현정과 헤어지고 조찬모임에 참석한다. 아주 어려서 부모를 사고로 잃고 키워주던 외조부모마저 돌아가시고 형과 단둘만 남아있다. 지훈의 형, 명훈은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자페증 환자다. 아무데서나 속옷을 내리고 자위를 하는 등 통제가 안 되는 형 때문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랑에 관한 소설은 넘쳐나지만 실연에 관한 소설은 흔치 않다. 실연은 사랑과 동전의 양면이다. 사랑 없이는 실연도 불가능하고 실연 없이는 새로운 사랑도 불가능하다. 이 소설은 실연이 중심 주제이긴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진정한 사랑을 위한 치유를 이야기한다.
 
항공사 승무원인 사강은 유부남인 조종사 정수와 사랑에 빠진다. 심리학의 흔한 공식대로 사강의 사랑은 아빠로 인해 생긴 콤플렉스와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반영한다. 정수가 아내와 이혼하겠다고까지 했을 때 사강은 갑자기 결별을 선언한다. 아마도 평생을 두고 가장 싫어했던 여자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끔찍했을 것이다.

현정은 지훈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불안하기도 하다.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지만 시설에서 살고 있는 명훈을 지훈이 평생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혹처럼 걸렸을 것이다.  막상 헤어졌지만 지훈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아마도 결별을 합리화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정은 알고 지내는 결혼정보회사의 미도에게 지훈과의 자연스러운 재결합을 요청한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미도가 현정의 요구에 대한 해결책과 동시에 자기 회사의 새로운 사업 영역 개척까지를 노린 야심찬 프로젝트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 기획은 타인의 슬픔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나쁜 짓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지훈과 사강은 사진과 ‘슬픔이여 안녕’을 매개로 일본에서 만나게 된다. 지진과 정전이라는 특별한 분위기 속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공감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의 비밀을 나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관계들 속에서 만들어진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한다. 지훈과 사강이 사랑에 빠질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강의 정수나 아빠에 대한 태도, 지훈의 현정과 명훈에 대한 태도, 거기에 더해 세상에 대한 태도는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사랑과 실연의 과정은 이성과 감정, 직관과 감각 같은 모든 정신 작용이 총체적으로 작동하고, 내면의 콤플렉스나 그림자 같은 것들이 격렬히 부딪치는 과정이다.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내면의 상처를 직면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솔직하게 드러내고 대화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가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사강은 애써 외면하던 ‘슬픔이여 안녕’을 읽기 시작하고 책에 빠져들면서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오래 전 이 책의 번역자가 사강의 아빠였다. ‘슬픔이여 안녕’에서의 안녕(Bonjour)은 헤어질 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한다고 한다.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고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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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호 2012-07-31 10:45:26
언어의 한계가 인간의 한계...괜히 마음에 와닿네요...

전민용 2012-07-30 14:44:51
오래 전 소설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백영옥작가의 스타일이라는 소설을 읽었어요. 나중에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가볍고 경쾌한 재미있는 연애소설 느낌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내가 보기에는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상심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만찬 모임'을 추진해보겠다면 저도 환영입니다. 상심의 기념품가게도 열어 바꿔보고 싶은 책들 가져와서 교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류재인 2012-07-30 12:07:45
근데 어째 책보다 샘 리뷰가 더 재밌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ㅋ
그나저나 요즘 같은 때 '상심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만찬모임'도 좋겠네요. (저녁은 만찬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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