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틀’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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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틀’ 생각하기
  • 이성오
  • 승인 2012.09.17 11: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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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건치 담쟁이]세상을 보는 눈

 

작년 ‘제인에어’란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중고등학교 시절 자칭 문학소년 소녀라면 필수적으로 읽어봐야 할 책이었다. 아직 여권신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 젊은 여성이 역경을 견디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감동스럽게 다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에서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제인과 달리 미치광이 이면서 주인공 남자를 불구로 만들어버린 그 여자(버사 메이슨)의 비극에 대해선 당연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언급하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에선 ‘제인에어’에서 미치광이로 다루었던 버사 메이슨을 크리올 여성인 ‘앙투아네트’로 재탄생시킨다.
같은 주인공을 다루고 있음에도 제인 에어와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이 여성을 표현한다.

“네, 그럼요, 위층이고 아래층이고 활활 타고 있을 때 로체스터 씨가 다락까지 올라가서 자고 있던 하인들을 깨우고 탈출하게 해 주었답니다. 그러고는 미친 아내를 구하러 갔지요, 그때 사람들이 그 부인이 지붕으로 올라갔다고 소리쳤는데, 실제로 그 부인은 팔을 휘저으며 흉벽 위에 서서 일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만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지요.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들었답니다.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이 길고 검더군요. 불꽃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죠. 저를 비롯해 몇몇 사람이 목격했는데, 로체스터 씨는 채광창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갔어요. 로체스터 씨가 ‘버사!’ 하고 불렀어요. 그러고는 미치광이 부인한테 다가갔지요. 그러자 아이구, 그 부인은 찢어지는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 뛰어내렸고, 다음 순간 길 위에 떨어져 있었지요.”(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p. 805)

.......나를 증오하는 사나이가 나를 부르고 있다. 버사! 버사! 바람이 내 머리에 닿으니 머리칼은 마치 날개처럼 물결치며 펄럭였다. 내가 만일 저 아내 단단한 돌바닥으로 뛰어내리면 내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나를 둥둥 뜨게 하겠지. 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지붕의 끝자락 너머로 눈을 돌리니 쿨리브리에서 수영하던 작은 강이 보였고, 거기 티아가 서있었다. 티아가 나를 보고 손짓을 했다. 내가 주저주저하자 티아가 웃었다. 티아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무서워서 그래? 다시 나는 그 사나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버사! 버사! 이 모든 것을 나는 순간이라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듣고 보았던 것이다. 하늘은 너무도 붉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생각했다. ‘왜 내가 소리 지르지?’ 나는 티아! 라고 소리치며 지붕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p. 238-239)

진 리스의 작품에 대해선 탈식민주의 학자인 스피박이 자세히 다룬다. 스피박의 문제의식은 서구담론을 통해 타자를 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식민지이든, 지배계층이든 억압된 상황을 벗어나려면 억압하고 있는 집단들의 논리 혹은 담론을 먼저 깨뜨려야 한다는 논지이다.
탈식민주의 학자인 스피박의 이러한 이론은 현재 삶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피박의 이론은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잔인하게 우리 생활 속을 파고 들어 오고 있다.

제인에어의 버사 메이슨처럼 담론을 통한 해석 틀로 우리를 얽어매는 대표적인 예로는 과거 식민지시절부터 이어 온 ‘조선 사람은 맞아야 한다’, ‘조선놈은 게으르다’와 같은 말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빨갱이’란 용어의 프리즘이 그것이다.
이 용어들은 반세기가 넘게 어느 집단 어느 사상을 가진 자를 검증하는 해석의 틀 역할을 해왔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극우신문들은 자신들의 담론과 논리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게끔 대중들에게 강요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에서의 ‘앙투아네트’를 ‘제인에어’의 ‘버사’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은 방식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이에 가장 걸 맞는 이야기는 아마도 인디언을 다룬 영화일 것이다. 과거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디언’들은 미개하고 착한 백인들을 죽여서 머리 가죽을 벗기는 괴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자기네 땅을 이방인인 백인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수용소와 비슷한 곳으로 이주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저항의 역사라는 점은 그리지 않았다. 바로 현상을 바라보는 눈과 담론이 백인에게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이 일본에서는 테러리스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해석 틀이 1991년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로 일정정도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20년 후에 나온 영화 ‘아바타’에서는 오히려 ‘늑대와 춤을’의 해석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본다. 그래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을 단순하게 ‘이슬람=테러리스트’란 등식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해석 틀 보다는 진일보 한 셈이다. 한번 만들어진 지배적인 해석의 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네트워크치과와의 전쟁이 중요해진다.

불법네트워크치과와의 전쟁 또한 이러한 해석 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생긴 것은 아니고 신자유주의의 등장이후 경쟁을 강조하고 의료의 영리적 목적을 당연시하는 전 세계적 풍조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본인들이 인정하든 하지 안 하던 간에 신자유주의의 20대 80, 그리고 영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공공의료를 축소시키는 해석 틀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IMF 이후 우리의 삶과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득세와 더불어 의료의 영리목적이 합법, 당연시 된다면 의료를 바라보고 그것을 행하는 의료인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들이 등장하면서 가져온 해석 틀에 맞춰줘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는 ‘영리보다는 진정성 있는 의료를 위한 해석 틀이 승리하느냐?’ 아니면 ‘영리를 의료의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해석 틀이 승리하느냐?’의 과정이다.
리오타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디페랑(differend)에서는 무엇인가가 문구로 표현되기를 “요청하며”, 당장 문구로 표현될 수 없는 잘못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존재들이 침묵에 수반되는 고통을 (또 새로운 관용어의 발명이 수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될 때가 있다. 바로 그 때 그들은 언어에 의한 소환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기존의 관용어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증가시키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그 때 문구로 표현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 현재 그들이 문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능가함을,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관용어의 제도화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Jean-Francois Lyotard, The Differend: Phrases in Dispute, tr. Georges Van Den Abbeele (Minneapolis:Univ. of Minnesota Press, 1988), p. xi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 p. 410. 재인용)

리오타르의 주장처럼 우리는 당연하게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들, 즉 ‘제도화된 관용어’가 어떤 해석 틀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해봐야 한다. 만약 이러한, 어떻게 보면 귀찮은 과정들을 거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문제를 제시하는 집단 혹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관용어 속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들이 ‘앙투아네트’에서 ‘버사 메이슨’으로 바뀌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성오(진안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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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2-09-20 11:33:35
그렇지요. 프레임이라고도 하고요. 이번 대선에서의 관건도 누가 프레임을 장악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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