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의 페루여행기] 차빈 데 완따르
상태바
[박종순의 페루여행기] 차빈 데 완따르
  • 박종순
  • 승인 2005.03.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차빈 데 완따르 사원
차빈 데 완따르 사원은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주된 문명인 차빈 문명의 근원지가 되는 곳이다. 학자마다 학설이 좀 다르긴 하지만, 방사성 탄소측정에 의하면 대략 기원전 1000에서 300년경 사이에 존재했던 문명이다.

이 차빈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주변 세력을 무력에 의한 정복에 의하지 않고 문화적, 예술적 역량으로 영향을 미쳐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약 3천년 가까이에 그처럼 세련된 조각품과 건축물, 토기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또한 수수께끼 중 하나인데 그만큼 그 시대에는 독보적인 문명이었던 것이다.

후에 나온 나스까나 모체 같지 않게 토기에 생활상을 그려 넣지 않아 그들의 실생활 모습을 알기에 부족한 면이 많지만, 조개무지 같은 연구에 의하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 농작물의 안정적인 확보가 아마도 이런 예술적, 문화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종교와 예술적으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석두상(Cabeza Clava)
차빈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신의 모습을 새긴 신상 조각품들로 지난번 박물관 부분에서 언급했고, 차빈 데 완따르 신전을 장식했던 석두상과 신전 벽을 장식했던 부조물 등 조각품이 많다. 또 차빈 토기는 주로 깊거나 얕은 홈을 파거나 긁어서 모양을 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차빈의 건축물은 어떤 주변문명의 영향 없이 불쑥 만들어 졌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제법 체계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차빈 데 완따르 신전은 처음 세워진 부분과 나중에 증축하여 확장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신전은 둥근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ㄷ’자형 형태로 건물의 중앙에는 어두운 십자형 방의 형태인 태양의 신전이 있고, 바로 여기 교차점에 차빈 초기의 최고신인 란손이 있다. 란손은 퓨마와 인간이 합성된 5m 크기의 거대한 석상으로 머리 부분은 뱀으로 장식되어 있고, 퓨마의 송곳니와 발톱을 가졌다.

▲ 차빈 초기 최고신 란손
신전은 어두운 지하실 형태로 갈레리아(Galeria)라고 이름 붙은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다.  

초기에는 이곳에 살았던 작은 공동체를 위한 소규모 신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점점 차빈 문명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신전이 확장되어 갔는데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또 후에는 점점 사람이 많아져 신전 안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어 잘 다듬어진 돌판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광장이 만들어 지기까지 했다.

신전을 둘러가며 돌로 만들어진 처마가 있었고, 그 밑에는 석두상(Cabeza Clava)이 있다. 이 석두상은 유적지에서 약 200여개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단 한 개뿐 이었다. 또 이 석두상은 거의 모든 박물관에서 모두 볼 수 있을 만큼 차빈 문화를 보여주는 특징적인 조각상이다.

증축되며 만들어졌다는 매의 문은 차빈 예술의 걸작품 중 하나인데, 양쪽에 어두운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원형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 표면에는 복잡한 무늬로 장식된 매 한쌍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의 것이 숫컷이고 왼쪽의 것이 암컷이라 한다. 이는 태양과 달, 빛과 어둠, 흑과 백, 추위와 더위 등 우주의 음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돌기둥 위에는 8마리의 매 장식이 남아 있는 돌판이 올려져 있다.

▲ 매의 문의 둥근 기둥
지금 차빈 데 완따르 신전은 그 명성에 비해 상당히 많이 파괴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산 속 깊은 곳임에도 잉카시대에 이곳에서 신을 경배하기 위한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아 스페인 침략 시 그들에 알려져 파헤쳐지고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폐허가 되었다.

후에 이탈리아 지질학자 안토니오 라이몬디가 이곳을 찾았으나 단지 잉카의 유적으로만 알게 되었고, 이 때 라이몬디 돌판이라는 후기 최고신으로 여겨지는 신상을 발견해 리마로 옮겼다.

그리고 체계적인 발굴과 그 역사적 가치는 페루의 고고학자 떼요에 의해서였다. 역시 떼요 오벨리스크라는 중기 최고신 신상을 발견하였고, 많은 유물들을 모아 작은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는데 1945년 대홍수와 산사태로 인해 이곳 유적지가 다 파묻히고 주위 마을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 한다. 이 때 망가진 자기 집을 수리한다고 이곳 돌들을 많이 빼가 버렸다 한다.

우리가 간 날은 잔뜩 흐리더니 비까지 내리는 날씨여서 훨씬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위대했던 고대문명이 망가진 지금의 모습은 많은 생각들을 교차하게 만들었지만 당시의 의식을 상상해 보면 인간을 질서정연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우주의 신들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보았던 그들의 종교개념을 느낄 수 있었다. 

붙여본 음악은 조엘 프란시스코 페리가 연주하는 불의 땅(Tierra del Fuego)이라는 곡이다. 조엘 프란시스코 페리는 남미 음악에 경도된 프랑스인이자 전세계에 남미음악을 전파하는 전령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불의 땅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의 광활한 땅 파타고리아를 가리킨다. 비바람이 거세고 매서운 추위 때문에 오지로 남은 땅 . 16세기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서구인들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전설로 남아 황금의 꿈을 꾸게 했던 땅이다.

▲ 신전의 돌로 쌓은 벽. 지진을 고려해 경사지게 쌓았다
황금의 꿈을 쫓아 떠돌던 측은한 군상을 위함 때문인지, 재물에 집착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한 서글픔인지, 아님 그들의 희망과 삶을 삼키고도 침묵하고 있는 파타고니아 대자연을 노래함인지, 나직하게 잦아드는 케나의 울림에는 짙은 우수가 깔려있다.

박종순(서울 인치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