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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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탄생
  • 유동기
  • 승인 2013.01.14 12: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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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기 원장의 『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①

 

기원전 6세기에는 이웃한 그리스인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로마인이 기원전 3세기 끝 무렵 이탈리아반도에서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 후 200년 동안 제정(帝政)이란 독자적인 통치체계를 확립하고 헬레니즘 세계(그리스문명권)뿐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을 장악한 거대한 제국을 수립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가 정치적인 지배구조에 녹아 들어 하나의 사회적인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대도시가 로마시대의 식민지도시였다.

로마 초기에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로마사회의 군사적인 성격 탓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군사적인 자질이 월등해야 했다. 로마의 지도층은 30세 전후에 재무관을 취임하는 것을 첫 단계로 호민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으로 승진단계를 밟아 갔다.

재무관이 10명이면 집정관은 2명으로 지도층대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최고의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선거에 이겨야 하고 전쟁터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했다. 각각의 임기는 1년이고 중임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재차 그 관직에 오르려면 10년의 공백이 필요했으므로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적인 활약이 가문의 몇 대에 걸쳐서도 없으면 과거에 명성이 있더라도 지도층에서 탈락했다. 그러므로 국가, 가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망설임 없이 구실을 붙여 전쟁을 끊임없이 하였던 것이다.

전쟁은 전리품을 비롯해 막대한 부를 로마에 가져 왔다. 경제적인 착취를 노골적으로 한 것은 지중해의 패권을 쥔 다음에 하였으므로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로마시민들의 경제적 궁핍에 따른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수복한 영토의 일부를 공유지로 몰수해 로마시민이나 라틴동맹의 시민들에게 영지로 나누어 주고 그곳에 정착시켰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가 몸값을 지불하면 해방되고 그렇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갔다. 기원전 168년 3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마케도니아 측에 가담한 에페이로스는 전 후에 로마의 보복으로 15만 명의 주민이 노예가 됐다.

이와 같이 로마는 대외전쟁을 통해 매우 싼 값으로 노예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대토지 소유의 농장경영이 가능했고, 또 노예가 필수불가결한 경제구조로 변해 전쟁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는 고대사회가 몰락한 요인으로 로마가 평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노예유입이 중단됐기 때문에 소작제로 경제구조를 바꿀 수밖에 없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로마는 패배한 나라에 대해서도 영토의 일부를 공유지로 접수하거나 일부의 공납을 받는 이외에는 군사적 동맹국으로 대우했다. 즉 전쟁이 발발할 때 군대를 제공하고 로마인이 지휘관 역할을 한다는 것 이외에는 로마인과 동맹국과의 관계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지도층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선호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로마는 선전포고를 할 때는 적국과의 경계에서 페티알레스(fetiales)라 불리는 신관단(神官團)이 점을 쳐서 선전포고를 하는 수속을 밟아야만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됐다. ‘정당한 전쟁’이 아니면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각국이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 국제관계가 전개된 것은 ‘30년 전쟁’이 끝날 때 체결된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부터이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영토가 아니더라도 필요하면 개입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고 타국의 자치를 침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기원전 264년에 남자 시민 수가 29만 2000명이었고 기원전 225년에는 동맹군의 동원수는 반이고 총동원하면 75만 명에 로마시민군을 합하면 100만의 군대를 운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 동원한 군대가 5만 명인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군사력이라 할 수 있다.

유동기(유동기치과 원장 동작구치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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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3-01-15 09:54:43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읽은지도 십몇년이 지난 것 같네요. 제 기억으로는 제정은 시저 이후 황제가 등장하면서부터이고 호민관이나 집정관 제도는 제정 이전의 정치제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호민관은 평민들이 뽑은 평민의 최고 대표였고 귀족들의 최고 대표인 집정관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종의 의회제도인 원로원제도뿐 아니라 평민들의 민회도 있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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